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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난존자와 여시아문 -퍼온글-

Jinyoung Ssangkum Ryu 2013. 11. 23. 15:27

여시아문(如是我聞)


   여시아문(如是我聞)은 모든 불경의 첫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말이다.

이것은 부처님 사후에, 제자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모아 경전으로 엮는 이른바 경전결집 시에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서 언제 어디서 이러이러한 말씀을 하셨다 라고 구술하면 참석한 제자들이 아난존자의 구술내용의 정확성 여부를 확인한 후 맞으면 경으로 기록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때 아난 존자가 '나는 이렇게 들었다'라고 전제한 후 부처님 말씀을 구술하였기 때문에 모든 경전에 이 말이 들어가게 된 것이라 한다.

  성경도 불경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예수님 사후에 제자들이 그분이 가르친 말씀들을 기록한 것이다. 다만 두 경전의 구성상의 차이가 있다면, 성경은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라고 하여 말하는 사람(話者)의 입장에서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불경은 '나는 이렇게 들었다'라고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상도 말씨에 '이 문둥이 자슥아!'라는 말이 있다. 같은 말이 듣기에 따라서는 심한 욕일 수도 있고, 친근감의 표시로 들릴 수도 있다. '밉다'는 말도 그렇다. 미움은 사랑의 반대말이다. 그런데 이 밉다는 표현이 때로는 사랑하는 연인이 내게 눈을 흘기며 '미워'라고 말 했을 때, 나는 그 '미워'라는 말이 정말 미워서 하는 말이 아니라 반대로 사랑한다는 은근한 표현임을 금방 알아챈다. 이처럼 언어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그리고 상황에 따라 똑 같은 하나의 말이 전혀 다른 말로 들릴 수도 있다. 말하는 사람은 이런 뜻으로 말했는데, 듣는 사람은 저런 뜻으로 듣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아난은 언어가 갖는 이러한 다중성을 잘 이해한 사람이다. 부처님께서 천이백오십 명의 제자들을 앉혀놓고 어떤 말씀을 하셨을 때, 그 말씀이 천이백오십 명에게 다 똑 같은 말로 들렸을까? 그리고 그 자리에 있었던 천이백오십 명이 모두 똑같이 부처님의 말씀 속에 함축된 진의를 100% 알아들었을까?  그건 어림없는 일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말의 진실한 뜻은 부처님 자신을 빼고는 결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100% 알아들었다고 믿었다면 착각이다. 단지 자신의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

  아난은 이러한 언어의 다중성을 충분히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겸손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화자(話者)의 입장에서 말하지 않고, '나는 이렇게 들었다(如是我聞)'라고 들은자의 입장을 고수한 것이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如是我聞)'라는 말 속에는 내가 아무리 그분을 일평생 시봉한 시자였다 하더라도 내가 부처님 자신은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의 내용이 100% 내가 들은 그대로의 것인지, 또 천이백오십 명의 제자들이 각기 그 말씀을 어떤 말로 들었는지를 내가 다 안다고 할 수는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만일 부처님께서 누군가에게 '이 문디 자슥아'라고 했다 치자. 어떤 사람은 그말을 욕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은 칭찬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욕으로 들었건 칭찬으로 들었건 각자의 추측이요 생각일 뿐, 그것이 욕이었는지 칭찬이었는지는 오직 화자인 부처님 외에는 결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난은 모든 불경마다 서두에 '내가 듣기로는 이랬다'라는 단서를 붙여, 내가 듣기로 이러 이러한 것이었으므로 사실은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김으로써, 불경 내용이 순도 100%의 부처님 말씀이고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은연중 허용하고 있다.

  반면, 성경의 기술방식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러이러 했다'는 식으로 되어있어,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치 예수님 뱃속에서 나오기라도 한 듯이 단정하고 있는데,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 뱃속을 100%다 드려다 봤다는 식이니 지독한 아상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불교인들 보다 지독한 문자주의 도그마에 빠지게 된 것도 이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부처님께 직접 들은 말을 옮기면서까지 언어가 갖고 있는 다중성의 독소를 놓치지 않은 것이 바로 여시아문(如是我聞)인 것이다. 여시아문은 우리에게 불경에 쓰인 내용에 대해서, 또 거기 기록된 부처님 말씀에 대해서 의심하기를 허용한다. '내가 듣기로 이랬다' 이므로 달리 들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이리 볼 수도 저리 볼 수도 있는 여지, 어느 한쪽으로 고정되지 않는 가변성, 이것이야 말로 금강경이 강조하는 파상(破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비 선악 고저 장단이 항구 불변적인 것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 옳은 것이 그른 것이 될 수도 있고, 선이 악이 될 수도 있는 중도의 도리, 부처님께서 설하신 진리의 말씀에 대해서까지도 '내가 듣기로는 이랬다'라고 하여 의심을 허용함으로서 고정된 상에서 벗어나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 말이 여시아문이니, 이 여시아문 한마디 속에 팔만사천법문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여시아문 하나만 정확히 깨쳐면 더 이상 불경을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 진정한 중도의 원리가 그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열반하시면서, 그 많은 법문을 남기셨음에도 '다 잊어라. 난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하신 것도 당신이 설한 법문이 진리의 말씀이라 하여 후인들이 거기에 고정되고 집착하여 그르칠까봐 그동안의 모든 말씀을 '아무 말 안한 것'으로 격하시켜 주신 것이니 이 또한 여시아문인 것이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는 말은 '다른 사람은 달리 들을 수도 있다'는 뜻이된다. 부님의 말씀이 마구니의 말이 될 수도, 마구니의 말이 부처의 말씀이 될 수도 있다는 말,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없는가? 

-꽃을 드니 미소짓다 카페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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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난존자와 여시아문

 

 

아난존자는 경전을 처음에 칠엽굴에서 마하깟사빠존자가 경전을 결집하기 위해서 오백 명의 비구 스님들을 모이게 했어요. 마하깟사빠존자는 본래 경하고는 관련 없는 인물이었어요. 사실은 선사였다 그랬죠. 그래서 삼처전심, 부처님에게서 마음법을 전수 받은 이입니다. 그러고 본인은 항상 칠엽굴에서 참선 정진을 주로 했죠.

 

그래서 경전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서 별로 그렇게 생각을 안 했는데, 부처님께서 입적하시고 얼마 안 돼서 금방, 어떤 제자가 그랬다 그러죠. “야~ 인제 잘됐다. 인제 자유다. 잔소리에서. 부처님의 잔소리에서 해방됐다.” 하하~ “아이~ 부처님은 맨~ 날 우리가 이거하면은 이거 해서는 안 된다. 저거하면, 저거 해야 된다. 뭐 이렇게 잔소리를 하셨는데, 이제는 마침내 우리가 해방됐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걸 듣고서 ‘야~ 이거 안 되겠다. 그냥 놔두었다가는 불법이 끊어지겠다.’그렇게 생각을 해 가지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결집해야 되겠구나.’ ‘경을 모아서 전승을 해야 되겠구나.’ 하고 이런 생각을 하죠.

 

왜냐 하면은 참선법이나 명상은 많~은 다수의 대중에게 전승하기가 어렵죠. 쉽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보통 일대 일이나, 일대 몇, 이렇게 가는 거지. 그러나 경전은 수많은 사람에게 전할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후대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계~속 이어지기 위해서는 경전 결집의 필요성이 있는 거죠.

 

그래 가지고 오백 명의 스님들을 모아서 경전을 결집하게 되었는데, 그때 아난존자는 당연히 자기는 다문제일의 제자니까, ‘나야말로 가장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하고 갔죠. 그 자리에. 그때 깟사빠존자가 “넌 안 돼.” 하고. 하하~ “넌 나가.”하고. 퇴출시킨 거예요. 깜짝 놀랬죠. “왜냐 하면은 넌 아직 아라한과를 못 얻었어. 그러니까 안 된다.” 그 자리에는 아라한과를 얻은 제자들만 모이게 한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비유가, 부처님께서도 여러 번 아난존자에게 “듣기만 해서는 네 것이 아니다. 그것을 네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참선을 해야 된다. 선정을 닦아야 된다.” 이렇게 누누이 말씀을 하셨어요. 그런데 그 말은 안 들었던 거죠. 그래서 말하자면은 부처님의 경전은 마치 약 처방문 같은 것이고, 참선은 그 처방을 해서 먹는 것과 같다. 우리가 약 처방문을 맨 날 달달 외우고, 하하~ 읽는다고 병이 낫는 게 아니거든요. 약을 처방전대로 지어서 먹어야 병이 낫는 거지. 그래서 “말씀은 약 처방문이고, 참선은 약 처방문을 약을 지어서 먹는 것과 같다.” 이런 말씀을 하셨죠.

 

근데 말 그대로 아난존자는 처방문은 잘~ 기억했는데 약을 지어먹지 않았다. 하하~ 선정은 닦지 않고, 별로. 주로 경전을 듣고, 또 사람들에게 전하고 이러는 일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아난존자가 부처님을 대신해서 법문을 해준 사례도 많습니다. 비구니 스님들에게도 부처님을 대신해서 법을 설해주고, 또 신도들에게도 부처님을 대신해서 법을 설해주고, 이런 경우가 많죠.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직 아라한과를 못 얻었어요. 그러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퇴출당했는데. 그러고 나서도, 퇴출당하고 나서도 역시 법을 설했다고 합니다. 신도들이 “아유~ 큰 스님 오셨다.”고. 그러자 다른 스님이 옆에서 한마디 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느냐면 게송을 읊어주는데, 이런 말을 해요.

 

고요한 나무 밑에 앉아

마음은 열반에 들어

참선하고 게으르지 말라

말 많아 무슨 소용 있는가

 

이런. 비꼬는 거죠. 인제 고만, 말은 많이 그동안 할 만큼 했으니까. 하하하~ 고요한 나무 밑에 앉아서 마음이 적멸에 들어서 참선을 게을리 하지 말라. 계속해서 말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런 말을 듣고, 마침내, ‘아, 참. 그렇지. 내가 이래선 안 되겠다.’하고 생각을 돌이켜 먹고, 일주일동안 참선을 하는데, 특이한 방법으로 해요. 참선을 어떻게 했냐면은, 우리가 보통, 참선 그러면 나무 밑이나, 집에서 이렇게 가부좌 틀고 앉아있는 걸로 생각하는데, 아난존자는 그게 아니고, 벼랑 끝에 가서 절벽위로, 벼랑 끝에 가서 서있는 거예요. 그것도 그냥 서 있는 게 아니라 발뒤꿈치를 들고. 하하하하하~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죠. 그러니까 정신이 바~짝 나는 거죠. 하하하~ 그러니까 그만큼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고, 한 치의 틈도 없이 깨어있게 되죠. 거기서 졸수는 없잖아요. 일부러 아주 극단적인 처방을 한 거죠.

 

‘내가 그동안 너무 말씀을 듣고 전하는 데에만 열중했구나. 마음으로 이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처방전대로 약을 지어냐 먹어야 병이 낫겠구나.’하고 그런 방법을 극단적으로 써 가지고, 마침내 일주일 만에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와~ 그래서 아라한과를 얻고 나서 스스로 기쁨에 겨워가지고 칠엽굴로 도로 갑니다. 갔더니 문을 닫아놨어요. 그래서 막 문을 두들기죠. 꽝꽝꽝꽝꽝~ “형님~”하하하~ 마하깟사빠존자가 자기보다 선배니까, 막~ 깟사빠존자를 찾죠. 깟사빠존자가 문 안에서 “어쩐 일인가? 자네는 퇴방 당했는데 왜 다시 왔나?”하하하~ “아, 저도 드디어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저도 들어갈, 결집에 참가할 자격이 생겼습니다.” 그러는 거예요. “그래? 그렇다면은 열쇠구멍으로 한번 들어와 보게나.” 하고 마지막 테스트, 파이날 테스트를 한 거예요. 하하~ 문에 열쇠구멍이 있잖아요. 요마~랗게. 그리 들어오라는 거예요. 하하~ 하하하~ 일반인으로서는 불가능하죠. 아라한과를 얻게 되면은 신통력이 생겨요. 아라한과라는 것은 무아법에 통달해지는 거거든요. 무아법에 통달해지니까 신통력이 생깁니다. 신통력이 생기니까 자기 몸을 자유자재로 열쇠구멍으로 싹~ 해서. 무아니까. 하하~ 하하~ 해서 들어올 수가 있는 거예요.

 

우리 왜, 절에서 전해 내려오는 얘기 가운데 그런 얘기가 있어요. 어떤 사람이 수행을 하고자 하니까 큰 스님께서, 절에 가면은 창호지 문이 있잖아요. 방문에다가 구멍을 하나 조그맣게 뚫어놓고, “니가 저 구멍을 계~속 쳐다보고 있어라. 그러면 언젠가 그 구멍에서 소가 한 마리 들어올 거다.” 하하하하하~ “소가 한 마리 들어올 때까지 그걸 쳐다봐라. 음~ 그러면 니가 마침내 견성하리라.” 하고 이런. 화두죠. 말하자면은. 화두를 준 적이 있어요. 그래 가지고 그 스님이 계~속 문구멍. 밥만 먹으면 문구멍 쳐다보는 게 수행이니까. 하하~ ‘언제나 저기 소가 들어오려나~ ’사실 요만한 문구멍에 소가 들어온다는 게 불가능하죠. 불가능하니까 화두가 되는 거예요. 이치적으로 따져서 답이 나오면 화두가 안 되는 겁니다. 예. 그래서 계~속 그 구멍을 쳐다보고 있다가 마침내 소가 들어왔어요. 그래 가지고 “아니고, 큰 스님 마침내 소가 들어왔어요.” 하하~ 하하~ 그래 가지고 인정을 받게 된 그런 일화가 있어요.

 

그거하고 비슷하죠. “열쇠구멍으로 들어오너라.” 그래서 열쇠구멍으로 마침내 들어갔다 그래요. 그래 가지고 들어가서 마침내 경전을 그동안 암송했던 모~든 경전을 촥~ 결집해 내는. 참여를 하는 게 아니라. 고때까지는 마하깟사빠존자가 주도적으로 일을 했던 것이고, 실제로 그 순간부터는 아난존자가 주도적으로 경을 결집한 거죠. 그래서 계~속 경을 읊어냈는데. 처음에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라는 말을 안 하고 그냥 했대요. 경전을. 기억나는 대로. 그러다 보니까 오해가 생겼어요. 사람들이. ‘어, 아난존자가 부처님의 혹시 화신 아니야?’똑같이 말을 합니다. 부처님이 말했던 대로 고대로 얘기하니까. ‘혹시 부처님의 화현 아니야?’ 이런 식으로.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오해할 정도로 그렇게 정확히 읊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는 ‘안 되겠다. 사람들이 오해가 있으면 안 된다.’ 해서 그래서 ‘이와 같이 난 들었다.’이건, ‘저는 아난존자지, 부처님이 아닙니다.’ 이런 마음으로.

그 다음에 경전을 결집하다 보니까 광명이 나고, 광채가. 또 부처님과 거~의 똑같이 이렇게. 사촌동생이니까, 아마 거의 용모나 목소리, 또 이렇게 이런 게 비슷했었나 봐요. 그러다 보니까 또 오해가 생기고. 후대 사람들에게 오해가 안 생기게 하기 위해서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여시아문’ 이렇게 붙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난존자가 참 너무나 소중한 분이고, 아난존자하고 가섭존자, 요 두 분을 부처님 좌우에, 좌우보처로 이렇게 모셔놓은 절도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문수, 보현보살님을 주로 많이 모시는데, 실제적으로 인도에 가면 지금도 아난존자와 가섭존자를 이렇게 모셔놓은 그런 곳이 있어요.

 

그래서 두 분이야말로 진짜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섭존자는 선정, 아난존자는 경전. 요것을 아주, 불교의 양대 맥이죠. 양 날개 같애가지고, 그 어느 한쪽도, 뭐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 이렇게 얘기할 수 없잖아요. 사실 ‘경전이 더 중요하냐? 선정이 더 중요하냐?’ 이걸 따지는 거 자체가, 마치 ‘너 오른 다리가 더 중요하냐? 왼쪽 다리가 더 중요하냐?’ 하고 따지는 거 하고 똑 같애요. ‘어느 다리를 짤를래?’하하하하하~ 어느 게 더 중요하다고 따지는 거 자체가 무모한 짓이고, 양 다리, 양 날개와 같애 가지고, 둘 다 불교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그래서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그렇게 핵심이 돼 가지고 경전을 결집해냈다는 거. 이게 아주 소중한 교훈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가 배우고 전하는 거, 이거야말로 불법을 유지시켜주는 거라는. 경전에도 누차 나오잖아요. 금강경에도, 법화경에도, 이 세상에 복을 짓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어요. 우리가 신년 인사 가장 많이 하는 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새해 복 많이 받을려면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복을 지어야 돼요. 지어야 받게 됩니다. 씨를 부려야 결과가 나오지, 씨도 안 뿌려놓고 맨 날 소득이 나기를 바래서는 안 되죠. 그러면, 복을 짓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최상의 방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남에게 전하는 거다.’ 이게 바로 최상의 복덕이라 그러죠.

 

그래서 그런 ‘법륜을 굴린다.’고 저는 표현하는데, 항상, 저는 작년에도 그랬고, 그랬지만은, 올해도 역시 ‘저의 목표는 법륜을 굴리는 겁니다.’ 법륜을, 더 법륜을 굴리는 해, 올해는 작년보다. 내년은 또 더욱 더 법륜을 굴리는 해. 이렇게 하하하~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남들에게 전해 주는 거.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이 ‘스토리텔링, 삶은 환타지다’ 이 시간이야말로 복 짓는 시간이죠. 엄청나게. 하하하~ 하하~

                                                                           

                                                                             -제21회 아난존자와 여시아문-행불카페에서 퍼옴

 

 


 

출처 : 삼보사진방
글쓴이 : 진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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