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천황가는 백제 초고왕 후손이다.
일본천황 부인이 백제 공주였다는 주장은 종종 있어왔다.
일본 계체천황의 부인 수백향 황녀가 백제인이었다,
환무천황 모친이 백제인이었다 등등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전에 현재 일본 천황가를 세운 최초 천황, 즉 1세 신무천황부터 백제왕의 후손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알아본다.
일본의 최초 역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모두 8세기에 만들어졌는데,
두 책 모두 신무천황은 일본 건국신 스사노오와 일본 태양신 아마테라스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후손이라고 전한다.
두 책에 기록되기를 일본에는 이자나기, 이자나미라는 탄생신 부부가 있었다.
이 이자나기 남신의 눈에서 태양여신 아마테라스가 생겨나고,
이자나기 남신의 코에서 스사노오라는 남자 해신이 태어났는데,
이 스사노오가 사실은 2세기 백제에서 건너간 백제왕 초고왕이었고,
아마테라스는 [위지/동이전]과 [삼국사기]에 기록된 히미코 여왕이라는 사실이 일본 신사 기록들을 추적한 결과로서 밝혀진다.
1. 스사노오는 백제국왕 우두천왕이다.
먼저 오오사카의 백제왕신사를 본다. 여기서 백제왕은 일본의 성씨다.
660년 백제 멸망 몇 년 후에 백제 의자왕의 아들 선광이 천지천황에게서 하사받은 성이 백제왕씨(百濟王氏)다.
선광의 증손자 경복은 서기 750년경에 백제왕신사를 지었다. 일본 최초 역사서인 [고사기]나 [일본서기]가 지어진 바로 그 무렵이다.
백제왕 신사 배전의 우두천왕
백제왕신사의 본전에는 백제왕씨 조상들을 모시고, 배전에는 바로 “백제국왕 우두천왕”을 모신다. 아래 사진은 백제왕신사 배전과 현판을 찍은 것이다.
백제국왕 우두천왕이란 바로 일본 건국신 스사노오라고 신사 기록에 전하는데
백제왕씨가 백제국왕의 조상신으로서 스사노오를 천삼백년간 모셔온 것이다.
백제국왕 중에 우두천황은 누구인가? 백제 초고왕이다.
2. 스사노오가 왜 도래인인가?
스사노오는 신라 소시모리 땅에서 왔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다. 즉 신라 우수주 지방이다.
일본 제명천황이 656년 오사카에 세운 야사카 신사(八坂神社)의 기록을 본다.
[八坂社舊記集録]에 의하면 제명천황 2년에 고구려사자가 일본에 올 때에 부사인 이리노사주가 신라땅 우두산에서 제사지내는 스사노오신을 야사카에 모셔와 제사지냈다고 하였다.
그런데 12년후 천지천황이 스사노오를 우두천왕으로 바꿔불렀고 명치유신 이후 다시 스사노오로 부른다.
[八坂郷鎮座大神之記]
齊明天皇即位二年丙辰八月(656년) 韓國之調進副使伊利之使主再來之時
新羅國牛頭山座須佐之雄尊之神御魂齋祭來而 皇國祭始依之愛宕郡賜八坂郷並造之姓
十二年後 天地(智)天皇御宇六年(667년)丁 社號為威神院宮殿全造營而牛頭山坐之大神
乎牛頭天王奉称祭祀畢 淳和天皇御宇天長六年(829년) 右衞門督紀朝臣百繼尓感神院祀
官並八坂造之業賜為受續
이 야스카 신사에서는 중앙에 스사노오를 모시고 스사노오 부인으로 동측에 모시고, 스사노오의 자손 8왕자(공주)를 서쪽에 모신다.
祭神は素戔嗚尊(中御座)、櫛稲田姫命・神大市比売命・佐美良比売命(東御座)、八柱御子神(八島篠見命・五十猛命・大屋比売命・抓津比売命・大年神・宇迦之御魂神・大屋毘古神・須勢理毘売命)(西御座)稲田宮主須賀之八耳神(傍御座)である。
[고사기]나 [일본서기]에서 스사노오가 탄생신 이자나기의 코에서 만들어진 아들이라지만
야스카 신사 기록으로 실제로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이 명백하게 확인되는 것이다.
3. 스사노오가 왜 백제인인가?
스사노오가 일본에 정복 국가를 세운 곳은 일본의 근도(根島) 시마네였다.
이전에는 출운국이라고 했는데 스사노오는 근국이라고 하였고 남근(男根)의 의미가 있다.
스사노오 고분이 있는 시마네현 파천군(簸川郡) 대사정 히미곶 히시미사키 신사(日御碕神社) 기록을 보면
스사노오는 출운국을 세우고 웅성봉에 올랐고, 거기서 백제의 바람(柏葉を風)으로 점을 치고 사라졌다. 여기서 백엽(柏葉)은 잣나무잎이 아니라 백제로 해석되는 것이다.
왜냐면 그 뒤에 3세천황 안녕천황이 백지송百枝松으로 신목神木을 세워 제사지내도록 하는데 백제송百濟松을 백지송으로 왜곡하여 고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10세 개화천황은 신전을 짓도록 하였는데 이 신전을 백지괴사百枝の槐の社라고 하였다. 즉 백제목사百濟木社라는 뜻이다.
社伝によれば、素盞鳴尊は出雲の国造後熊成峯に登り、鎮まる地を求め柏葉を風で占うと隠ケ丘に止まり、そこで御子天葺根命は御魂をその地で奉斎したという。隠ケ丘(古墳)は社殿の裏側にある。日沈宮はもと文(経)島に鎮座した。天葺根命が文島にいた時、天照大神が降臨し、「我天下の蒼生(国民)を恵まむ、汝速かに我を祀れ」との神勅によって奉斎したのが始まりという。安寧天皇一三年勅命によって百枝松を神木として祀り、開化天皇二年勅命により神殿を造営し(『出雲国風土記』記載の百枝の槐の社がこれか)、天暦二年(九四八)現在地に遷座したという。鎌倉時代以降幕府の崇敬篤く、社殿の修造、戦国時代領主堀尾氏の七八○石余の寄進、江戸幕府の六○○石の朱印領安堵と社運盛んであった。神事・宝物が多く伝わり、春祭は神の宮、秋祭は日沈の宮中心の形態をとる。
(출전, http://www.genbu.net/data/izumo/hinomisaki_title.htm 신사 사전 神社 辭典)
안녕천황의 백제송 신목 제사 기록은 스사노오가 심어놓은 백제송이 크게 자랐다는 것이고, 백제송 신목으로 제사하는 것은 당시에 스사노오 고분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신사 기록은 신무천황 뿐 아니라 안녕천황, 개화천황이 다 백제계라는 확실한 방증이다.
히미곶 고분 능비문에서 스사노오는 갑신년 7월7일 54세로 서거했다고 하는데, 204년 7월에 해당하고, 151년생이 된다. [삼국사기]에서는 166년에 즉위하여 214년에 서거하였다. 따라서 서거년도는 214년으로 보아서, 일본 능비의 151년-204년 기록은 초고왕이 일본 땅에 몇 번씩 나타나서 스사노오로서 활약한 기간이 되며 실제 생년은 알 수 없다.
한편 일본 [신찬성씨록]에는 금부련씨, 삼선숙녜씨, 진야조씨 등이 “속고대왕”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속고대왕이 백제로부터 아들들을 데려 가서 남긴 후예인 것이다.
[신찬성씨록]에 기록된 백제, 고구려 왕중에 대왕으로 기록된 분은 속고왕이 유일하다.
4. 스사노오가 왜 백제 초고왕인가?
스사노오 고분을 가진 신사이니 스사노오에 대한 최초 기록으로 고려되는 그 신사 기록에서 스사노오의 별명이 팔-속수신(八-束水神), 팔악염존(八握-髯尊)이었다.
속수(束水)의 왕, 긴수염 왕, 또는 우리말 발음에 의한 흰-수염왕이라는 뜻이 된다.
스사노오는 [고사기] 이래로 다케하야스사노오建速須佐男, 스사노오速佐男, 스사노오素佐能雄, 스사노오素盞嗚, 스사노오素佐能雄, 스사노오進雄, 우두천왕牛頭天王 등으로 기록되는데 팔속수신(八束水神)이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고려된다.
즉 가장 중요한 것이 속束 , 속束, 소素 라는 글자다. 초고왕의 이름이 소고(素古), 초고(肖古), 상고(尙古), 조고(照古) 등으로 기록될 수 있는데 소(素), 초(肖), 상(尙), 조(照)에 대한 현대 일본 발음은 “쇼”로서 모두 똑같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즉 백제어의 뿌리인 고대 부여어에서 같은 발음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건속수建速須는 속수국을 세웠다는 뜻인데 속고왕이 건너와서 세운 땅 이름이 속수가 되는 것이다. 현재 팔속군(八束郡)이라는 지명도 생겨나 있지만 저 신사가 위치한 파천(簸川)이 고대 팔속수(八束水)로 고려된다.
초고대왕은 이즈모出雲 히가와斐伊川의 수가須賀에 야에가기八重垣 궁을 세웠다. 수가는 좋다는 뜻이라고 하나 우리말 속고(速古)의 일본화 발음이다.
속고왕의 속고는 무슨 뜻일까? 우두천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쇠왕, 혹은 쇠코왕이라는 뜻이다. 스사노오의 탄생 설화에서 탄생신 이자나기의 코에서 태어났다고도 하였고, 쇠-사노의 “사노”가 아프리카 고어에서 코를 의미한다. 아프리카는 현생 인류의 발생지이다.
즉 흰코왕, 쇠코왕의 의미가 있는데 특별히 코가 컸거나, 코를 쇠투구로 가렸을 수도 있다.
5. 백제 초고왕은 한반도 어디서 일본으로 갔나?
고구려 사자가 일본에 오면서 스사노오신 영혼을 모셔온 신라 우두산은 당연히 한반도 동해안이다.
백제가 한반도 서해안을 통해 일본을 가는 것도 가능한데 이는 일본 규슈로 가는 길이다. 왜국이 중국과 교통한 길이다.
일본 근도 시마네현으로 가는 길은 함흥이 가깝다. 초고왕 때도 당연히 그러했을 것이다.
백제가 서해안을 통해 일본을 가는 것은 가야에 가로막혀 있다가 4세기 근초고왕 때에 다시 개통한다.
신라 우수주는 [삼국사기/지리지]에서 춘천으로 비정되어 있지만, 춘천이 백제 온조 때는 주양성이었고, 백제의 동계였다. 우곡성, 우수주인 함흥 지방은 춘천의 서쪽이다.
온조왕 때의 우곡성이 당시 함흥 지방으로서, 신라, 고구려, 백제의 우수주로 고려된다.
함흥시 동쪽에는 초고왕의 이름과 관련되는 초고대령草高臺嶺이 아직 남아있고, 초고대령 동북에 초막산草幕山, 제봉산鵜峰山이 있다. 초막산 북쪽에 우두산牛頭山(814m, 현재 봉화산)이 있었고 그 북쪽에 함관령이 있다. 그 서북쪽에 덕산동 초원고성草原古城이 있는데 토성으로서, 1147척의 호위성이다. (백제 초기는 거의 토성을 지었다.)
함흥 함주의 고성
[삼국사기/지리지]에서 우수주牛首州는 다른말로 오근내烏根乃라고도 했는데, 함흥 성천강城川江의 서쪽 가지 이름에 흑말천이 있다.
오근내의 근根이 뿌리이고 속고왕이 일본에 새운 곳이 도근현島根縣이고, 한반도로 돌아간 곳이 역시 근국根國이었다.
오근내烏根乃와 관련하여 함주군 북쪽 상조양면 위에 오악봉烏岳峰이 있다. 오악봉 남쪽에는 한당고성이 있고. 그 남쪽에는 우봉석성牛峰石城이, 동북쪽에는 자고성慈古城이 있다.
[삼국사기/지리지]에서 우수주에 자현磁縣이 있었는데, 바로 자고성慈古城에 해당한다.
6511척의 한당고성閑堂古城이 토성인데, 동해안까지 확장된 백제 동부의 우수주 부도성으로 유력하고 자고성은 평양의 자모산성처럼 북쪽 호위성이다.
함흥시 주변을 살펴보면 남쪽 정평군定平郡에 수시리고성隨時里古城(400m토성)이 있었다.
스사노오의 8왕자로 스사노오 신사에 모셔진 스사노오 딸 이름이 바로 수세리공주須勢理毗賣라고 했다. 대국주신이 근국으로 찾아와서 수세리공주와 결혼하였다.
수세須勢도 중국어 발음기호표기식인 반절半切로 보면 “쉐(shu-e)”발음인데 “쇠”의 우리말 고어다. 정평의 수시리고성은 금이강金伊江이 감싸고 있는데, 금이金伊도 “쇠+l”의 이두吏讀 기록이고 금이강이 쇳물이다. 이 지역에 광산이 많이 있으니 수시리고성은 쇠를 다스리던 곳이기도 하다. 금이강 서북쪽 사수산泗水山(1747m)도 사수泗水가 곧 쇳물이다.
금이강 남쪽에 이웃한 금야강金野江은 고대에 비류수沸流水라고도 이름했다.
특히 함흥시 남쪽 문천시 지명 중에 현재 시마네현 지명과 흡사한 지명들이 많다. 또한 스사노오와 관련된 인물들의 이름과 유사한 지명도 있다.
문천시 남쪽의 속고산速高山이 속고왕 이름자 산이고, 쇠코산의 의미이니,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쇠달산所依達山이라고도 했는데 신사神祠가 있었다고 전한다.
속速을 소의所依로 풀어쓴 것이니 역시 쇠를 의미한다.
문천시 문주의 속고산
고구려 사신 이리사주가 백제 초고왕 신위를 모셔온 신라 우두산은 이 문천시 속고산이다.
문천시 북쪽 천불산에도 속고봉速高峯 이름이 남아 있다.
문천군에 매홀석성妹屹石城이 있었고, 이는 문주文州라고도 했는데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 개로대왕을 참살한 때에 백제 문주왕자는 여기에서 신라로 내려가서 구원병 1만을 얻을 수 있었다.
스사노오 속고왕은 이즈모出雲 히가와斐伊川의 수가須賀에 야에가기八重垣 궁을 세웠다.
여기서 히가와斐伊川는 바로 문천시文川市 서쪽 배지이천配歧伊川에서 유래한 것이다.
문천시에 매성妹城이라는 고성이 있었는데, 왕비를 기린 것이라고 고려되고,
히가와의 히斐도 여신을 의미한다.
문천시에 절문루節文樓가 전해오는데, 스시노오의 부인 이름도 절명전희櫛名田姬다.
즉 절명전희는 문천시 배지천에서 초고대왕, 스사노오를 따라서 도일한 백제 본토 여인으로 고려된다.
비이신사는 5세 천황 효소천황孝昭天皇이 세웠으니 효소천황도 역시 백제계이다.
함흥 지방으로부터 시마네현으로 지명의 이전은 사람의 이주에 의한 것이다.
제명천황 때에 고구려 사자는 진흥왕 이후 신라에 편입된 문천 땅에서 신라에게 압박 받았을 백제 초고왕 신위를 백제 후예인 일본 천왕에게 전해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백제 초고왕이 일본에 진출하여 스사노오가 된 바닷길은 동해 바닷길이다.
6. 백제 초고왕의 일본 활동
초고왕은 166년부터 204년까지 백제왕이었고
[후한서/왜전]에는 146년부터 189년 사이(桓靈之間)에 왜국에 큰 혼란이 있었고, 비미호가 왜여왕으로 등극하여 247년에 죽었다.
[고사기]에 의하면 스사노오가 태양신녀 아마테라스와 큐슈 아소산 아래 마나이(真名井)에서 겨루었는데, 결론은 아마테라스가 자녀 8명을 낳았다.
아마테라스와 그녀의 신녀들이 함께 낳았다고 추정된다.
이때 여동생 와카히메는 스사노오가 놀래켜 죽였다고 했는데, 그녀의 능비 비문으로 보면 160년경에 47세로 죽었다.
나이가 많은 여동생이기보다는 비미호를 모시는 하급신녀로 고려된다. 비미호가 그보다 언니이면 당시 출산하기 힘들 것이다. 훗날 비미호의 아들이 신무천왕(194-256)을 낳는다.
능비가 발견된 장소가 효고현(兵庫縣)이므로, 실제 비미호와 스사노오가 싸운 곳은 규슈가 아니라 오사카로 고려된다. 그곳에 수진국(秀眞國)이 있었고 비미호는 본래 수진국의 신녀 여왕이었다.
스사노오 속고왕은 아마테라스 비미호 등 신녀들을 시마네현의 팔중궁에 끌고가서 가두고 출산을 시켰다. 그후 스사노오 속고왕은 백제로 가면서 부인이었던 아마테라스 비미호를 왜여왕으로 남겨두었다.
비미호는 왜여왕으로서 규슈 아소산 아래 미나이에 하강하여 그 동쪽 해안에 야마대 왜국을 세웠다. 마치 소서노가 고구려에서 갈라져나와 백제를 세운 것과 같다.
스사노오 속고왕의 아들은 스사노오 속고왕과 비미호 사이에서 낳은 이복 여동생과 결혼하여 규슈에 살기도 하였다.
즉 비미호는 명목상 여왜왕이고 스사노오의 아들들이라는 80명의 백제 왕자를 비롯한 도래인들끼리 규슈 고천원과 근도의 이즈모, 오사카의 대와에서 지역 분점을 하고 있었다.
비미호는 왜여왕으로서 중국과 교류하였고, 비미호가 247년 죽은 후에는 왜왕위를 놓고 다시 한번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 규슈에서 일어나 오사카의 대와를 점령하고 근도 출운국을 복속시켜서 왜왕위를 차지한 것이 신무천왕이 된다.
7. 참고 사항
1. 온조시대 우곡성을 차지하고 다루왕 때 동부 우곡성을 쌓았는데 계속 말갈의 침략을 받아 양민이 끌려갔다. 125년에 신라가 동해안의 말갈로부터 침략을 받으니, 백제 기루왕己婁王(재위 77~128년)은 백제의 다섯 장군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였다. 즉 말갈은 백제의 우곡성을 거쳐 신라까지 내려갔지만 백제 장군이 동해안 영토를 되찾은 것이다.
2. 온조백제의 건국지, 초고왕이 백제왕을 지낸 한산 위례성은 서울 한강이 아니라 평양 대동강이다. 당시 대동강의 이름이 한수였다. 대동강의 낙랑고분은 백제 고분이다.
3. 스사노오의 일본 진출로 백제 왕자들이 일본에 갔다. 초고왕의 아들 구수왕은 일본의 대국주신이다. 대국주신 신사 기록에 고구려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대국주신은 조산고분 능비문에서 238년 서거하였다. [삼국사기]에서 구수왕의 아들 사반왕은 234년에 즉위하지만 [삼국유사]에서는 238년 즉위로 되어 있다.
구수왕의 아들 사반왕은 일본의 사대주신이다. 이후에 신무천왕이 여타의 초고왕의 아들이나 구수왕의 아들들을 물리치고 오사카 대와에 들어가서 대왜국을 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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