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history

무적 몽고에 맞선 고려의 30년 위대 항전 上編

Jinyoung Ssangkum Ryu 2009. 1. 4. 17:55

무적 몽고에 맞선

     고려의 30년 위대 항전 上

       - 숨겨진 고려 영웅 낭장 (郎將)문대(文大)의 죽음

 

제목이 의미하는 이글의 취지가 무엇인지 독자 여러분들은

짐작이 갈 것이다.


오늘 한국 5000년역사에서 ‘최고’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뭐 별로 틀리지 않을 고려 민군의 영웅적인 민족 보존 투쟁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 조상이 수나라나 당나라 그리고 일본등을 상대로
상상을
초월한 대 저항전을 전개해서 이들을 격퇴한 것은

역사에 길이 남겨져 있다.


그러나 다른 고구려와 조선의 적이 아시아 급 챔피언이라면

고려 민군이 대결한 몽골은 세계를 휩쓴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었었다.


이미 아시아 챔피언 급인 대륙의 금나라를 박살냈고 중국인 남송도

쓸어버린 무서운 기세로 고려를 덮친 슈퍼 파워급 대군이었다.


그리고 이들 몽골군은 항복하지 않은 적은 몰살시키는 잔인한

야만성을 발휘했었다.

고려의 민과 관과 군은 이런 끔찍한 공포에도 굴하지 않고

죽을힘을 다하여 저항했었다.


그리고 이들 고려 민과 관과 군이 이들 몽골군과 살을 깎이고

뼈를 잘려 가면서 혈투를 벌린 기간이 우리 민족사
어느
전쟁보다도 긴 장장 30년의 세월이었다.


대몽 전쟁은 (對蒙戰爭) 누가 보아도 한국 민족 항쟁사에

최고, 최장의 영웅적인 전쟁이었다.


나는 이 대몽 전쟁을 보면서 항상 왜 이 전쟁은 왜 우리 현대에

크게 평가 받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점에 의문을 가져왔었다.


을지문덕이나 이순신이나 강감찬 같은 영웅이 없어서인가?

그러나 대몽 전쟁에도 이 분들과 비교할 영웅들은 여럿 있었다.


먼저 이야기가 한참 동안이나 삼천포로 빠지는 것 같지만 시공을

훌쩍 건너뛰어 한참 뒤 1500년대 전국시대 일본으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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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5년 가히의 영주 다케다 가쓰요리는 삼만 병력을 일으켜

인접 도쿠가와 영지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도쿠카와 영내의 나가시노 성을 포위했다.

성의 성주는 도쿠가와의 사위 오쿠다히라 사다마사가  단지
500명의
부하만 데리고 성을 지키고 있었다. 


나가시노 성- 아래 소개하는 스네에몬은 이 강을 타고 탈출하여
오다와 도쿠카와 연합군에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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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요리는 나가시노 성의 군세가 미약하게 보여

금방 함락 시킬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급한 지세에 지은 성은 공격하기에 워낙 안 좋았고

오쿠보 사다마사의 지휘가 출중해서 좀처럼 함락을 시킬 수가 없었다r


그렇다고 나가시노 성 부대의 형편도 느긋한 것도 아니었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원군(援軍)이 좀처럼

달려 와주지 않은 것이었다.


이 때 오다 노부나가는 차제에 다케다 군을 쓸어버릴

비책을 짜고 필요한 철포를 긁어모으고 부대를 훈련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원군 파견의 시간이 지체되었다.


기진맥진한 성주 오쿠다이라 사다마사는 부하 중에 성실한

도리이 스네에몬(鳥居 强右衛門)을 밀사로 도쿠가와에게 파견했다.


도리이 스네에몬은 심야에 성에서 나와 강을 따라 헤엄쳐 올라가

다케다 군의 포위망을 뚫고 오다와 도쿠카와에게 가는

밀사 임무 완수에 성공했다.


오다와 도쿠카와는 시급한 출동을 약속한다.

스네에몬은 성으로 돌아오다가 다케다 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그를 심문한 다케다의 중신 아나야마 겐바노가미는 그에게 제안한다.

살려 줄테니 성의 방어군에게 오다와 다케다의 부대가 구원군을

보내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지요.”

꽁꽁 묶인 스네에몬은 가까운 본성의 망루가

잘 보이는 앞 바위위로 끌려갔다.

스네에몬은 시키는대로 성을 향하여 외쳤다.


“성안에 있는 분들에게 말합니다.”


바위위에 오른 스네에몬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 도리이 스네에몬, 성으로 돌아가려다 이렇게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전혀 후회는 없습니다. 오다 도쿠가와 두 대장님은---”


일단 말을 끊었다.


“이미 사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오카자키를 출발하셨습니다.

 이삼일 안으로 반드시 운이 트일 것입니다.

 성을 굳건히 지켜주십시오!"


“ 와아 !"

성안에서 함성이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다케다 군 졸병 두 명이

바위에 뛰어 올라 스네에몬을 끌어내어 사정없이 구타했다.


그리고 중간은 생략 --


놀림을 당해서 분노 할대로 분노한 가쓰요리의 직접 지시로

내린 처형이 뒤따랐다..


스네에몬은 십자가에 묶이고 손에 못이 밖혀서 성을 바라보는

바위위에 높이 세워졌다.

구타로 정신을 잃은 스네에몬이 정신을 차리려 했을 때

두 겨드랑이 밑에서 창끝이 교차하여 양 어깨를 뚫고 나갔다.


“으으으-----”


스네에몬 시야가 갑자기 어두워지고 귀에서 소리가 울렸다.

그런 가운데서 누군가가 열심히 무언가를 말했다.


“ 도리이님! 도리이 님이야말로 참다운 무사,그 충성을 본받기

  위해 최후의 모습을 그려 기치로 삼으로 하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다케다 군의 가신 오치아이 사헤이치

 (落合 左平次), 스네에몬님,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스네에몬은 그 말에 웃음으로 답하려 했으나 더 이상

얼굴 표정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상대방 무사는 붓통을 꺼내 종이에 스네에몬의 최후를 그리고 있었다.

장소는 아루미가하라 , 사다마사 부대 야마가카 사부로베에의
진지 앞,
이미  석양이 시뻘겋게 물든 대지의 핏빛을 비추어
반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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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라면 가슴이 뭉클할 만큼  감동이 드는 전쟁의 로망이다.


스네에몬 말대로 며칠 뒤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대군을 이끌고 전장에 도착해서 나가시노 성은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다케다군은 밀어닥친 오다와 도쿠가와의 대군과
나가시노 전장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역사의 큰 기록으로 남는 대전투로서 오다의 철포 부대

3,000명의 연사로 다케다 군은 궤멸적인 대패를 한다.


나가시노 전투 - 오다군의 철포대에 의해서 다케다군은
거의 전멸,가쓰요리는 단지 댓명의 가신들과 함께 전장을 빠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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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네이몬의 주군과 동료을 위한 신의는 잊혀지지를 않아 그의
아들들은
대대로 오쿠다이라 가문의 중신이 되었다.


60년대 소설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대 히트 이전부터 이 일화는

일본에서 잘 알려진 역사의 감동 전쟁 스토리였다.


십자가에 묶여 죽은 스네에몬을 그린 오치아이 사헤이치는
그 그림을
자기 전투 깃발에 새겨 넣어 사용하였다.
이 기치는 지금도 일본
후쿠오카 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도쿠가와 막부시대 스네에몬의 죽음은 사무라이들이 즐겨하는

군담(軍談)의 주요 화제의 하나였었다.


그에 대한 사랑은 현대에 들어서도 식지를 않아

그의 전기도 출판되었었고 영화로도 만들어졌었다.

지금 일본 국영 철도 (JR)의 이이다선에는 도리이 스네에몬이라는

역이 있어 그의 충의가 어느정도 후세인들의 사랑을 받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위의 감동스러운 전쟁 로망의 이야기는 한국사에도 있다.

단지 이 영웅의 이야기는 일본과 달리 영웅 모시기가
게으른 후손 때문에 
고려사라는 책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묻혀있을 뿐이다.


1231년 일차로 고려를 침공한 몽고군은 압록강 아래
철주 산성을 공격했다.


기고만장했었던 침공 초반 몽고군은 앞으로 이 작은 반도에서
끔찍하게
힘든 전투를 겪게 될지는 모르고 철주 산성의
수비군이 자신들이 천하에
용맹을 드날린 몽고군이 아니라고 믿어서
저렇게 건방지게 저항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앞서 포로로 잡은 고려군 낭장 문대(文大)를 철주 산성으로

성문 앞으로 보내서 자신들이 진짜 몽고군이라는 사실을
말하라고 했다.

무시무시한 원조 몽고군이 왔으니 알아서 빨리 항복을
권고하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성 앞으로 끌려간 문대는 큰 소리로 외쳤다.

“ 이 놈들은 가짜 몽고군이다! 절대로 항복하면 안 된다!”


기대치 않았던 돌발 상황에 기가 차게 놀란 앞의 일본군과는

달리 몽고군은 재차 한번 기회를 주었다.

그에게 그러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달랬다.


그러나 문대는 성을 향하여 꼭 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외쳤다.

“ 이놈들은 가짜 몽고군이다! 절대로 항복하지 말고 끝까지 싸워라!”

울화통이 터진 몽고군은 그를 즉석에서 베어 죽여 버렸다.


그의 죽음에 눈물로 감동한 철주 산성의 군과 민은 처절하게

저항하며 반달을 버티었다.

그러나 양식도 떨어지고 병력도 소모되어 8월29일 몽골군이

성내로 난입하는 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상황이 막바지에 오르자 지휘자인 방어사 이원정과 판관 이희적은

자신들을 따라서 성에 들어와 있던 어린 자식들과 부녀자들을
몽고군에게 도륙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창고에 넣고 불을 질러
죽이고 자신들은
쇄도한 몽골군에게 최후 돌격을 함으로서 스스로
호국 산화의 길로 갔다.


몽골군은 성의 군민들을 포로로 잡고 쓸 만한 사람들은

자기 부대의 노무자로 징발하고 끝까지 저항한 사람들은
남김없이 학살했다.


위의 밋밋하게 쓰여 있는 낭장 문대의 영웅적 산화는 앞에서 소개한

일본 전국시대 도리이 스네에몬의 죽음보다 덜 감동적으로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위에 소개한 스네에몬의 일화는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작가 야마오카 쇼바지에 의해서 극적으로 윤색되고 문장적으로

미화 된 것이다.


자 -여기서 다시 여몽 전쟁의 배경으로 이야기를 옮겨보자

초원의 푸른 늑대 - 징기스칸



징기스칸의 등장은 별빛같이 미약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대한 태양 같은 존재로 세상을 뒤흔들다가
사라졌다.


몰락한 가문에서 몸을 일으켜 부족을 통일하고 국가를 세우고 그 기세를
몰아 들불처럼 유라시아 대륙을 짓밟았다.

 



그가 죽고 나서도 몽고족의 정복 사업은 그의 아들과
손자 대까지
계속되어 동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러시아,
남쪽으로는
인도 북부까지의 넓디넓은 영토를
몽고인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하였다.

몽골의 소수정예 기병 군단의 공격을 받고 쓰러지지 않은
군대와 국가는
거의 없었다.


아시아의 패자 중국은 물론 역시 광대한 러시아, 그리고 더 서쪽으로
나가서 폴란드와 헝가리 등의 유럽 군대까지도 이 몽골 기병군단의
강습 앞에서는 추풍 앞의 낙엽이었다.


기병끼리 붙은 야전(野戰)은 물론이고 성의 공성전(攻城戰)에서 세계
제국(諸國)과 기라성 같은 국가의 군대로서 몽고군의 적수가 되는
군대가 없었다.


무적 몽고 기병군단-페르시아의 세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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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은 국가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동쪽을 보자.

아시아 최강국 중국(남송)이 끝까지 저항하다가 멸망했다.

그리고 여진족이 건국해서 한때 중국을 누르고 중원의
패자 노릇도
해본 금나라도 멸망했다.


더해서 티베트 계통의 민족이 세운 서하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금나라에게 망했지만 서쪽으로 가서 서요라는 신생 국가도 세웠던  

글안 족은 민족 자체가 완전히 역사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 나중에 소규모로 토벌차원에서 정벌했다가 실패한 월남과 바다를

  건너 있던 일본은 제외)


그러나 그런 나라보다도 훨씬 작고 약한 고려만이 작은 반도에

끈질기게 매달려 몽고군의 거센 침략을 열 한번이나 맞받아치며

30년간 항복하지 않고 버티어내서 민족과 국체를 보존해냈다.


몽고는 결국 무력정복을 포기하고 회유와 외교술로 고려를 달랬고

국토가 결딴나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고려는

결국 고개를 숙여 몽고와 강화했으나 민족의 정체성,

다시 말하면 국가와 민족은 물론 왕조까지도 유지할 수 있었다.


징기스칸의 세계 정복 주요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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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전쟁에서 패했더라면 고려와는 비교도 안 되게 큰 중국과

금나라 그리고 서하와 서요까지 멸망시킨 몽고가 고려를 예외적으로

그냥 놔두지 않았을 것이었다.


고려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몽고인이 통치하는 지배구조가

들어섰을 것이고 문화적인 동화 정책이 실시되어 것이다.


또는 그들이 지배하던 몽골 직할령이나 중국의 일개
부속 성으로 편입되어
연명하다가 나중에 들어선 명나라에 의해서
접수되어 영원히 벗어날 수 없었던 중국의 한 변방 지역으로
흡수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티베트가 17세기에 내부에 분쟁이 일어나서 한쪽이
청나라에 원조를
청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가 청나라의
어이없는 속국이 되었고 그 정복 왕조인 청은 망했지만 공산 중국이
배턴을 이어받아 그대로 차지 해버린 것을 보면 짐작이 가리라 본다.


그 민족 말살정책의 가능성이 보이는 몽고의 야심이 들어나는

대목을 한번 보자.


1254년 고려에 침공한 몽고군 사령관 자랄타이는

철군을 요청하는 고려에게 아래와 같은 조건을 제시했다.


“ 고려의 국왕과 신하 그리고 백성들은 모두 육지로 나올 것이며

  두발 모두 몽골식으로 깎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왕을 몽고로 압송해 갈 것이다.

  두 가지 조건 중 한 가지라도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철수를  할 수 없다.”


비교적 외교적 수사라 하더라도 머리를 깎으라는 소리는
그들이
고려를 정복하면 고려민의 정체성을 완전히 말살시켜
버리겠다는
야욕을 들어낸 소리였다.

하여튼 그 무렵 어느 민족이나 국가도 맞서보지 못한 슈퍼 파워

몽고의 쇄도한 무력 앞에 그만큼 풍전등화인 운명에 있었던
고려의
악착같은 항전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했다.


몽고군이 간 곳 어디에서도 이런 치열하고 매서운 민족의
저항은 없었고
세계가 알아주던 몽고의 자랑스러운 기병 군단이
이렇게 볼품없는
전투를 한 적도 곳도 없었다.


고려는 어떻게 버티었을까?


알아보자--.


대몽 30년 전쟁에서 중국이나 유럽에서 많이 보이던 몇 만 명의

대 병력이 들판에 집결하여 격돌하는 그런 대규모 야전은
고려에서는
한 번도 없었다.


오로지 공성 전투와 야별초가 주도하는 게릴라 전투만이 있었다.


몽골이 주도한 여몽 연합군과 일본 가마쿠라 막부 무사의 전투
일본은 아무것도 모르고 몽골과 대규모 야전을 벌였다가 대패했다.
오로지 태풍이 이들을 구해주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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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공할 몽골의 침공을 고려가 방어 해 낼 수 있었던 것은

한민족이 삼국시대부터 부지런히 고구려 때부터 전 국토에

구축해 놓았던 각지의 산성(山城)들 공로가 제일 컸다.


주민들이 거주하는 곳이 아닌 주변의 높고 가파른 산정에
힘들게
쌓아 놓은 산성은 몽골의 장기인 기병 전략이 전혀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기병대는커녕 말도 올라가기 힘든 곳도 있었다.


몽고 기병단의 핵심  동력- 강인한 몽고말
고려의 산성은 이런 말들의 활동무대를 원천 봉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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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한반도 국방에서 산성의 중요성을 대몽 전쟁에서 절감했던
조선
세종 때 장수 최윤덕은 자신의 경험으로도 산성을 중요성을
인식하고
산성의 건설을 항상 역설했기 때문에 주변 정승들로부터

축성(築城)대감이라고 불렸다.


성에 이어서 고려의 항전에 중요한 역할은 한 것은 고려의
조정이
틀거 앉아 대몽 전투를 지휘했었던 강화도를 비롯한
서해안의 각 도서였다.
고려민은 섬으로 도망쳐 들어가 기회만 있으면 육지의
몽고군을 치고 빠지는 유격전을 전개했었다.


여기서 한마디 부언한다.

알려지기를 몽고군이 수전(水戰)이 서툴러서

강화도를 침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무리 수전이 서툴다 해도 강화해협은 육지의 강과 폭이 비슷하다.

모든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 한강등의 강은 문제없이 도강하여

한반도를 휩쓴 몽고가 이런 좁은 해협은 30년을 넘어
못 넘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해서 막강한 해군을 만들었다.

해상 방어의 최대 유효 방어수단은 해군이라는 기본상 상식을

상기해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강화도를 둘러싸다시피 초계하며 몽골군의
해상 내습을 경계했다.
더해서 서해안 지대를 계속 감시하며
몽고군이 강화도 침공을 위한  선박을 모으거나 건조하는 것을
계속 감시했다.


강화도의 고려군에게는 몽골군이 가지지 못한 이런
해상 방어력의 중추를
담당한 수군은 육지에 대한 통치와
육지로부터 물자 수송에 유효하게 
쓰이기도 했다.


강화도의 수군 크기가 어느 정도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나중에 고려조정이 몽골과 타협하고 강화하자 반발한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인원과 물자를 싣고 진도로 간 배는
무려 일천척이나
되었다는 사실은 고려 수군이 만만치 않게
컸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고려군의 강함도 있었다.

이미 몽고 침공 10 년 전 글안과의 전투로 이미 상당한
국방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고려군의 야별초군이 고려 전역에서 지방민과 지방군을 조직해
만든 야별초 게릴라 부대는 몽골 침공군을 뱀처럼 휘감고 물고
늘어져 지쳐 나가 떨어지게 만들었다.

전쟁중 입지가 강화되고 확대된 삼별초군이 항전 계속을
주장하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못하고 반발했다가 역사의
어두운 그늘로 사라진 것이 유감스럽다.



대몽 전쟁을 주도한 고려 무신정권이 세운 강화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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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군만이 아니었다.

공성전으로 치러진 대몽전쟁에서 승패는 항상 성을 지키다가도

틈만 나면 성 밖으로 쇄도해나가 몽골군을 공격한 고려 군민의

용감함이 결정지었었다.


이 세계 공성전에서 그렇게 흔하지 않은 간단없는

성외 출격은 고려군민의 강함을 증명해준다.


다음으로 무신 정권의 실력자였던 최우, 최항 부자의 

항전의지가 대단히 강했던 것도 한몫했다.


그 강한 세계 슈퍼 파워 몽고에 뭣을 믿고 저렇게
항거했을까 했을 정도로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끈질긴 저항과
외교전을 병행했었다.

무신 정권이 몽고에 벌인 외교전의 교묘함은 대단했다.


끈질기게 출륙(강화도에서 나와 개경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입조(고려 왕의 몽고 왕 알현)를 요구하는 몽고를 우롱하다시피

응대하며 전쟁을 이끌어 가서 위기 때마다 이 두 조건을

들어 주는 척하는 외교술로 고비를 넘기기도 했었다.


왕의 입조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태자의 입조로 대신했다.

더해서 왕조의 개경 환도도 전쟁이 끝나고

10년이 지나서야 행해졌다.


외교전을 한마디로 평한다면 대몽 전쟁을 주도했던
무신정권은 요새말로
말하면 몽고를 데리고 놀았다는
말이 적절할듯하다


무신 정권이 무너지고 결국 피폐해진 백성의 사정을 보다 못한
조정이
몽고와 강화를 맺었지만 삼별초는 항전 의지를 이어받아
진도와 제주도로
전전하며 몽고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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