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history

무적 몽고에 맞선 고려의 30년 위대 항전 하편

Jinyoung Ssangkum Ryu 2009. 1. 4. 17:51

무적 몽고에 맞선 고려의 30년 위대 항전 하편
2008/08/24 오후 3:08 | 무적 몽고에 맞선 고려의 30년 위대 항전

 

무적 몽고에 맞선

   고려의 30년 위대 항전 下篇

             - 스님 부대가 격파한 세계 최강군


몽고는 금나라와 동진국을 멸망시킨 1234년 다란바스에서
전략회의를 하고
앞으로 세계 정목 사업에 관한 토의를 벌인 결과,
다음과 같은 세계 정복을 위한 군사행동을 결정하게 되었다


1.바투 귀유그 뭉케 군; 동남 러시아와 동부 유럽방면을 공략한다.

2.코돈 코츄 거우본부카 군 :중국 남방의 남송을 정벌한다.

3.당꾸 군: 고려를 정벌하여 남송과의 연합체제 구축을 저지한다.


보시다시피 비록 고려가 작은 나라이긴 하나 몽고가 몽고를
남송 즉 중국과
그들이 한껏 휘저은 러시아와 유럽과 같은
거대 국가와 같은 전략적
가치를 있는 중요 목표로 보고
국력을 다하여 정벌하겠다는 심중이 보인다.

고려에게는 괴로운 일이었다.


이 결정으로 1235년 몽고는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였다.

당꾸 군은 1235년 여름 몽고군은 고려를 다시 침공한다.


1234년부터 1259년까지 장장 25년이나 계속되는 제2차

여몽 전쟁이 시작 된 것이다.


이 전쟁에서 고려군은 전번 전투에서 지방군의 전투 실력을
익히 보았던지라 정규군은 강화 일대에 집결시켜 철통 방어에
힘썼다.

더해서 경기도 서해안은 물론 지금 서울 지역의 주민들까지

강화로 이주시켜 방어군 규모를 크게 증강시켰다

경군의 강화 집중 배치는 후세에 무신 정권 최우가 자신들의
정권 보존에만 급급했다는
비난을 받았었다 .
 
그러나 몽고군  군사 작전의  제일 목표가  항상 강화도였던만큼  
강화도는 그만큼의 전략적 방어 가치가 있었다.


전투 준비도 치밀하게 하였다.
야별초 부대를 국내 도처에 파견하여 게릴라전을
지도케 했다.


야별초 부대의 대활약은 산성 방어와 함께 고려의 
대몽 2대 방어 전략의 주축이 되었다.
이들의 활약과 공로를 일일히 소개하지 못함이 아쉽다. 


삼별초가 본격적으로 전장에 데뷔하는 막이 오르게 된 것이다.

몽고군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몽고군의 전술에도 변화가 있었다,
이번에는 대규모 야전을 피하고 산성 작전으로 몽고군을 농락했던

고려군의 작전을 감안하여 몽고군은 소규모의 기동 부대로
여러 곳으로 분진하기로 했다.


6.죽주성 전투


1234년  남하한 고려군은 철통같이 지키는 개경과 강화도를
공략하지 못하고 계속 남하하여 죽주성(경기도 안성소재)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죽주성 방어 사령관은 죽주성 방호별감 송문주는 중앙에서

파견 되어 와서 죽주와 그 일대 군민 3,000명을 규합하여
방어군을 조직해서 몽고군의 공성에 대항했다.


죽주성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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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귀주성에서 명장 박서의 밑에서 치열한 대몽 방어전투를

끝까지 치러낸 노련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몽고군의 공성 전법의 뼛속까지 들여다보고 있었다.


몽고군은 공격에 앞서 수백기의 기마부대를 죽주성으로 보내서
우선 점잖게 투항을 권유했다.
그러나 투항을 권유 받자 말자 죽주 성병은 성문을 열고
뛰쳐나가
몽고 기병대를 급습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몽고 기병대는 당황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성이 머리끝까지 난 몽고군은 먼저 발석기 수 십대를 동원해서

성의 사대문에 치열한 포격을 가했다.

성문 앞을 가득 메울만큼의 바윗돌이 성루를 때리자 4 대문은

거의 다 파괴 될 지경이 되었다.


몽고군은 일제히 성안으로 난입하고자 쇄도했다.

그러자  침묵을 지키던 성안의 고려군 발석기들이 갑자기

일제 사격을 하는 바람에 몽고군의 공격이 제대로 되지를 않았었다.


공격이 돈좌된 몽고군의 자기들의 돌격을 연막 차장 하고자

성벽 밑에 나뭇단을 가득 던져놓고 사람을 죽여서 짜낸 기름을

끼얹고 불을 질러 연기를 가득 피웠다.


불은 연기뿐만 아니라 때 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성안의

건물들로 옮겨 붙어 성내에 연기가 가득했다.

성병들과 주민들은 불길을 피해 이리저리 피해 몰려 다녀야 했다.


이에 송문주는 최후를 각오하고 전병력을 동원해서 성 밖으로

출격해서 몽고군에게 덤벼들었다.


성안에 이는 거센 불길을 보고 좋아하던 몽고군은 갑자기
검게 그을린 고려군민들이 성문 밖으로 뛰쳐나와 죽기 아니면
살기로 돌격해오자
감당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큰 피해를 입고
도주했다.


발석기에 난타당했던 죽주성 성문 고려군은 도주하는 이들을
계속 추적하며 몰아대자
이들은
북방 50리 밖의 양근(지금의 양평)까지 쫓겨났다. 

그 뒤에도 몽고군은 반달가까이 죽주성을 공격했으나
죽을 고비를 넘긴 고려군의
더욱 완강해진 저항으로
할 수없이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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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군이 발석기로 발사한
수많은 바위로 난타 당했던 
죽주성 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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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죽주성의 선방은 차후 몽고군의 남하정책에 큰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후 계속 남진했지만 대규모 공성 전략은 포기하고
소규모로 부대를 분할 편성하여 각지를 초토화시키는 소극적인
작전을 했다.

소위 그들이 새로 채택한 ' 고려 영토 쑥밭 만들기 '전략이
제대로
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말발굽은 먼 남쪽 경주에 까지 이르러 1238년
황룡사의 구층탑에 불을 질러 소실시킨 것도 이런 쑥밭 만들기

작전의 일환이었다.


그렇다고 공성 전략을 다 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잡아 죽이기 쉬워 보이는 작은 성은 서슴치 않고 공격했다.


(상편에서 고려군 산성전투의 핵심중 하나가 그냥 성벽에 의지하여

성안에만 안주 했던 것이 아니라 몽골군의 틈만 보이면 과감한
성외 출격으로 적을 쳤던 것이 산성전투의 고비를 만들었다고
썼다. )


아래 두 개 작은 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7.작은 두 성의 성외(城外)출격


▼몽고 남로군은 9월3일 온수군(지금의 온양)의 성을 공격했다.

군리라는 작은 직책에 있었던 현려는 때를 보아 성문을 열고
뛰어나가
몽고군에게 맹공을 가해 몽고군 200명을 살상하고
여러 마필과
병기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온수군 공격에 실패한  몽고군은 서남방으로 이동하여
예산의
대흥성을 공격했다.

대흥성은 역시 수일동안 문을 닫고 완강히 저항해서 몽골군의

공세를 비껴낸 후 지친 몽골군이 틈을 보이자 성 밖으로 출격하여

몽골군을 대파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8. 삼별초의 대활약


이 2차 대몽전쟁이 터지면서 삼별초, 그 중에 지방에 파견된 야별초의

활약이 대단해졌고 전쟁이 진행되면서 그들의 역할은 더욱 커졌다.


그들의 게릴라 전투의 하나가 10월 22일 현 경기도 양평에 있는
지평현 전투였다. 수백기의 몽고군이 보급품 수송 부대와 함께
지평현에 도착해서 숙영하자  지역에 미리 조직되어있던  
야별초부대는 지방민과 함께  이 부대를 야간 기습했다.

결과 몽고군의 태반이 죽고 기병용 마필
그리고 수송 우차가 다량이 노획되었다.
이들 몽고군 패잔병들은 그날로 북쪽으로 도주했다.

1235년 12월 5일 호남과 호서의 주요 간선 도로인 공주의 효가동에서 야별초 지유(指兪) 이임수와 박인수가 각각
100여명의 유격대를
이끌고 도로를 따라 이동하던 몽고군을 기습하여
다수를 살상시켜
도주하게 만들었다.


몽고에서 1241년 몽고의 장종(오코타이) 죽자 다시 강화가
성립되고
불안한 휴전이 성립되고 몽골군은 철수했다.


이때쯤부터 지긋지긋하게 고려에게 당한 몽고내부에서 고려는
무력으로 점령할 수 없다는 무력 정복 가능성에 대한 회의가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그 때 러시아나 중국을 공격한 몽골군은 빛나는 전공을 세우며

그 거대 국가들의 심장부로 쾌속 진격하고 있었다.

반면 고려 침공군은 처음부터 죽을 쑤고 못난 꼴을 보이고만 있었다.


그러나 몽고 내부의 정쟁이 맺음을 하고 정종이 왕이 되자 몽고의

목의 가시 같았던 고려에 대한 미움이 다시 폭발했다.


강화 조약 따위는 습관적으로 차버리고 대제국 몽고에 공공연한

도전과 조롱을 일삼는 고려를 멸하기 위해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남송 정벌 전에 배후의 위협세력을 제거한다는
실질적인 목표도 있었다.


1247년 몽고 아무간 군이 고려를 침공했다.

이 침공의 특징은 1231년 살레타이 일차 침공 때 인주의
도령으로 있다가 1,500명의 부하를 이끌고 일찌감치 몽고에
투항한 민족 반역자 홍대선의 아들 홍복원이 앞장섰다는 점이다.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는 나중에 삼별초의 토벌에 앞장섰던
민족 반역을 대물림했던 역적 가문이었다. 


이번 침공군도 경험을 살려 큰 싸움대신 고려 “쑥밭 만들기”를

전면적으로 시도했다.


러시아와 유럽을 침공한 바투군이 호쾌한 야전과 공성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공포의 타격을 주었던 모습과 비하면
졸장스럽기 짝이 없었다.


아무간군도 바투군처럼 대활약을 하고 싶었지만 노회한 고려군은
그런 틈을 보여주지 않으니 이런 비적형 전투밖에는 할 방법이 없었다.


고려는 이들이 갈만한 지역의 백성과 물자를 강화와 서해안 섬으로
옮기고 유격전을 전개하는 청야(淸野)작전을 폈다.


몽고의 황제 정종이 또 짧은 재위기간을 지내고 저 세상으로 가자

몽고군은 두 해 동안 비적형 작전에서 고생만 하고 별다르게

얻은 것도 없이 철군하고 하고 말았다.


대신 고려내부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최충헌 이래 무신정권의 실권을 잡고 대몽 강경노선을 주장하던

최우도 1249년 죽었다.


그 아들이 최항이 집권했으나 그도 아버지와 같은

강화 조약 따위는 우습게 짓밟고 대몽 강경정책을 계속했다.


1253년 몽고군은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이 침공에서 성 방위군과 주민 천명 가까이가 대 옥쇄하는
장렬한
전투가 춘주성에서 있었다.


9.춘주성 싸움(춘천 봉의산성)


춘주성에서 안찰사(按察使) 박천기와 문학(文學)가 주변 주민을

모아 방어하고 있었다.


장렬한 순국의 성 춘천 봉의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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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초에 성을 공격한 몽고군은 투항을 권했지만 물론 결연한

거부 통보를 받았다.


▼고려군의 성외 출격에 항상 골탕을 먹은 공격군은 이번에는

교활한 작전을 썼다. 주변에서 포로로 잡은 주민들을 동원하여

성 주변에 목책을 이중으로 두르고 그 것도 부족해서
한길 깊이의
호를 빙 둘러 가며 팠다.


이것들이 완성된 뒤에야 비로소 공격을 개시했다.

몽고군은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하여 반달 동안이나 수 십 차례의

파상적인 공격을 성에 퍼부었다.


공격이 장기화되자 식량이 다 떨어지고 시석(矢石)도 바닥이 나자

성에서는 최후의 상태에 까지 몰렸다.


성의 우물마저 말라 식수가 떨어지자 마소를 죽여 그 피를 마시는

최악의 장면이 나타났다.


그러자 안찰사 박천기는 죽기를 결하고 활로를 찾기로 했다.


그는 6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결연히 성 밖으로 출격했다.

결사대는 빗발치는 몽고군의 화살을 뚫고 목책을 뚫었는데
결국
호를 넘지 못해 몽골군의 공격에 전원 전사하고 말았다.


이들을 전멸시킨 몽고군은 성을 바로 공격하여 남은 노약자와
군병 300명을 전원 몰살시켰다.


 ▼ 그러나 더 큰 옥쇄가 황해도 양산성에서 있었다.

8월12일 황해도 양산성이 운제를 타고 성벽에 넘은 몽골군이
불화살을
성내에 마구 쏘아 대 화재를 일으키고 성내로 쇄도했다.


성 방호별감 권세후는 칼로 자기 목을 찌르고 죽고
남은 성병과 주민 4,700명이 최후까지 싸우다가 전멸을 했다.


10.적장 예꾸 암살 작전

소수의 삼별초 특공군이 적 몽골 총사령관 암살을 시도한

작전은 특기 할만하다.


1253년 11월 중순에 교동도의 별초군 특공대가

교위(校尉)장자방(張子方)의 지휘 아래 해협을 건너 황해도

평산까지 잠입해 들어갔다.

목표는 고려 침공 총사령관 에꾸였다.


그들은 야간에 대담한 야습을 감행, 에꾸를 처치하지 못했지만

초급 지휘관급 10호장 20여명을 비롯한 다수의 병력을 사살하고

기마 병기들을 탈취해서 몽고 군 수뇌부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장자방은 다른 전투에서도 특공대장의 능력을 발휘했다.

다음해 1254년 8월20일 몽고군은 괴주성(지금의 충북 괴산)에
몽고
기병대가 주둔하자 장자방은 야간에 일대의 별초군을 거느리고

성을 기습하여 다수의 몽고 기병을 죽이고 성 밖으로 축출시켰다.


이들은 50리 거리의 충주성을 위협하여 자연히 항복시키고자

침공군 대장 자랄타이가 파견한 특수 임무부대 였다.


그런 중요한 부대가 기습당하여 볼품없이 돌아오자 자랄타이는

격노하여 직접 충주성으로 출동했다.


이 충주성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지만
성의 방호별감
김윤후가 (처인성의 살레타이 사살 주인공)
잘 선방해서
성을 지켜내게 된다. 


11.상주 성의 스님 부대 대활약


앞의 동선령 전투에서 산적까지도 보다 못해 떨쳐 나왔다는

사실을 소개했었다.

중생의 구도에 삶을 던진 스님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1254년 20 년 전 처인성에서 살레타이를 사살한 김윤후가 지키던
충주성을 공격했다가 갑자기 악천후로 혼란이 있던 사이 고려군의
성외 출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패퇴한 몽골군은 남하하여 상주산성
(지금 백화산성 추정)을 포위하고 공격을 준비했다.


마침 근처 황령사 주지이고 승장이던 홍지가 지방 사찰의 스님들을

모아 만든 승병부대 수 백 명을 거느리고 오다가 이를 발견하고

후방에서 몽고군을 급습했다.


홍지스님이 주지로 있었던 황령사- 후에 중건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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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군이 스님부대의 기습을 받고 동요하는 것을 본
상주산성의
군병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그들은 즉시 성 밖으로 밀고 나가서 스님 부대와 합세하여
몽고군을 타격했다. 몽골군은 대패해서 대구 쪽으로 패주했다.


그러나 전쟁은 이제 끝물에 다가가고 있었다.

위에서 고려의 영웅적 투쟁을 소개했다고 해서 고려가 상승무드의

승전 국가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 아니었다.
몽고군이 몰려오자
손을 들고 항복했던 성들도 부지기 수였고
성이 함락당해서
군민이 떼죽음 당한 성들도 적지 않았다.


홍유선 홍복원 가문과 같은 배신자들도 나왔었다.

그러나 중요했던 것은  국토 전체가 수시로 극히 야만적인 몽고군의

군마가 휩쓸고 다녔던 전장터가 되었었다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대몽전쟁 후기 몽고군이 주요 작전 목표로 자행했었던
고려 쑥대밭 만들기의 분탕질과 이에 맞서는 고려군의
청야 작전이 고려백성들에게 준 피해는 극심했다.


물적 피해만이 아니었다.


고려군에 징집되거나 양민으로서 전투에 동원돼

전사한 백성은 물론 인명경시의 몽고군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잡혀가서 노예생활을 하던  고려민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았다.


그때 고려의 작은 인구수를 감안하면 천문학적인 인적피해였다.

모든 피해는 고려 백성이 감내해야 했다.


대몽 전쟁은 고려 백성의 껍질을 벗겨내고 살을 저며 내고
뼈를 갈아내는
희생과 고통으로 치루어 낸 민족과 국가 보존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고려민의 항전 의지는 여전히 높았지만 전쟁을 끝낼 조건도
무언속에서 조용히 자라고 있었다.


반면 몽고에도 헌종 때부터  무력 정복을  포기하고 회유로서
고려를
포섭하려는 분위기가 짙어졌다.


30년간을 저항한 저 고슴도치같이 지긋지긋한 인간들을 무력으로
점령해보았자 앞으로 100년인들 저항하지 않는다는 법은 없다는
느낌이 몽고 수뇌부에 몸서리가 일기도  했다.

잘 달래서 말을 듣게 하자는 판단이 몽고 조정내에 퍼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고려의 국체와 왕조를 보장해주고 강화하기를 은밀하게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몽고는 줄기차게 요구했던 고려 왕의 몽고수도 카라호름에 있던
몽고왕을
찾아와 뵙는 입조(入朝)와 개경으로의 출륙(出陸)중
앞의 왕의 입조를
왕세자의 입조로 변경시켜주었다.


몽고가 고려왕이  찾아와서 항복하기를 줄기차게 요구하던
몽고 수도 카라호름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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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도 최씨 무신 정권 마지막 후계자 최의가 타도되었다

그 뒤에도 김준이니 임연이니 하는 무신들이 무신정권을 계승했지만

이미 세태는 문신들이 득세를 해가고 있었다.


결국 고려의 세자 왕전이1259년 4월 21일 입조를 위해 고려로 떠났다. 

그 사이 1259년 6월 30일 그간 30년 대몽 저항의 상징적 역할을 했던

고려 고종이 승하했다.


세자 왕전이 중국땅에 도착해보니 몽고왕 정종 문게도 승하했다.

그들은 급히 방향을 돌려 다음 몽고 황제가 될 미래의 세조 쿠빌라이를

만나러 중국 깊숙이 들어가 하남성 임여헌에서 쿠빌라이 칸을 만났다.

그리고 왕전은 돌아와서 승하한 고종의 뒤를 즉위했다.

이가 고려의 원종이다.


이 대에 끝까지 대몽 강경정책을 밀었던 무신 정권이 종말을 고했다.

고려군의 주력으로 성장했던 삼별초가 크게 반발하고 저항했지만
압도적인
병력의 동원으로 제주도에서 섬멸당하고 말았다.


국체와 왕조는 보존 할 수 있었으나 고려가 몽골에 무릅를 꿇은 뒤

일본 정벌에 내몰리고 갖가지 굴욕과 간섭을 받은 이야기는
여기서
논하지 않겠다.


단지 말했듯 고려는 몽고가 무력으로 점령하지 못한 유일한

대륙의 국가였다.


여기서 단지 상편에서 썼던 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고려가 몽고의 무력침공에 무릅을 꿇었더라면 고려는 왕조는

멸망하고 몽고 왕족이 다스리는 국가가 되었거나

후금이나 서하처럼 중국의 일부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랬었다면 고려는 다음에 중국 대륙의 패자가 된 명나라가 극히

자연스럽게 몽고의 유산이었을 한민족의 영토를 전리품으로

거두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은 가공할 중국의 이민족 동화력(이것이 몽고의 직접
통치보다
더 두려운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이 한자를
공용 문자로 쓰고 사대부 사이에 어느 정도 모화사상마저 있었던
한민족에게 효력을 발휘해서 지금쯤 서울의 한복판에 오성홍기가
휘날렸을 가능성도 배제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오로지 치열한 고려의 대몽 항전의 강도가 어땠던가 하는 것을

다음 왕이 된 원 세조 쿠비라이 칸의 직접 발언으로 보여준다.



원의 세조  쿠빌라이 칸 -마르코 포로가 만난 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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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입조한 고려 세자를 만난 자리에서 기고만장해서 한마디 했다.

 “ 고려는 만리 밖의 먼 나라로서 그 옛날 당 태종이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정벌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를 굴복시키지
   못하지 않았던가?

   이제 바로 그 나라의 태자가 스스로 나를 만나러 왔으니, 
   이것이야 말로
  하늘의 뜻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몽골이 간단히 휩쓸어 버린 거대한 러시아나 또 중국의
몇십분지 일에
지나지 않은 소국 고려가 입조했다고 해서
원대 명군으로 꼽히고
그간 수 십 개국의 항복을 위한 입조를
받아온 세조가 이렇게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좀 이상하게도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30년의 긴 세월동안  작은 고추 고려가 초강대국 몽고에게
어느 정도의 호되게 매운 맛을 맛보게 했는지를 짐작하게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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