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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발견된 발해=고구려 공식

Jinyoung Ssangkum Ryu 2009. 1. 4. 17:40

일본에서 발견된 발해=고구려 공식
일본에서 발견된 발해=고구려 공식
2008/12/04 오후 7:35 | 일본에서 발견된 발해=고구려 공식

 

일본에서 발견된  
             발해=고구려 공식

중국이 동북 공정이라는 것을 몇 년간 추진해놓고

그 결과로 내놓았던 고구려가 중국의 일부였다는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짓으로 한국민의 격렬한 분노를 일으켰다.


그 결과로 국민들의 경각심도 높아지고 고구려 전담 연구소도 설립되게

되었지만 지금도 이런 논쟁의 사각지대에 숨어있는 큰 분야가 있다.


한민족인 고구려인 대조영(大祚榮)이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

약 60년 뒤에 고구려의  고토에  세운 발해다.


상경 용천부에 있던 석등--- 영안 동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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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초부터 말갈족이 참여했었고 또 주민의 상당수가

말갈족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고구려의 유민들이 엄연한

국가의 주인들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발해는 이런 자체 기록을 자세하게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려서 중국이 일찌감치 발해 역사는
자기 역사로 만들어 버렸다.


여기에는 과거 우리 조상들이 발해를 동족이 세운 국가라는 사실을

인정했으면서도 [조선 시대 유득공이 이를 주장하기까지]

발해를 공식적으로 우리 민족 역사에 포용하지 않고 울타리 밖에

세워 놓았던 실수가 크게 역할을 했다.


근대의 중국 발해 연구는 20세기 초부터 본격화 되어서
개조 대조영을
고구려인이라는 자기들은 과거의 사서 기록조차도
무시해버리는 짓을
해버리고 있다.  


분명 신당서에는 대조영이 고구려의 별종(別種)이고 말갈족과 고구려

여종(餘種)을 모아서 건국했다고 되어있다.


옛 고구려가 600년 이상 다스리는 같은 장소에서 30년 남짓의 세월에
갑자기 고구려 유민들이
다 없어 진 것도 아니고 말갈족이 건국을
주도할 만큼 숫자가
폭증한 것도 아닐 것인데 이것은 조금 이상하다.


별종(別種)이라는 말은 고구려 멸망 후 중국 영주지방으로 끌고 갔던

중국 강제 이주 고구려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여종(餘種)이라는 말은 고구려의 구토에 남아 있었던

고구려 유민들을 말한다.


어느 모로 보나 고구려가 발해를 건국했던 가능성이

절대적이다


이렇게 혼란이 많지만 일본의 기록을 보면 의외로 발해에
대한 기록이 많다.

발해국 생존 228년 동안 35번의 발해 사신이 일본을
방문했던 기록이 있다.


일본 방문 발해 사신 명단- 최재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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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인들은 지금 러시아 영토인 크라스키노에서 배를
타고 동해를 건너 일본의 에치젠 지역으로 상륙했었다.


이 일본의 기록을 통해 발해=고구려의 공식을 확인해보자.

학계는 제일 첫 번째 개인적인 사절 파견과 방문  발해가 망한 뒤

마지막 사절 파견 두 번을 제외하고 33번으로 보는데 사신들의

명칭이 전혀 말갈스럽지가 않다.


인기 연속극 대조영에도 나왔던 말갈족 리더 걸사비우니

걸걸중상이니 하는 말갈족스러운 이름이 전혀 보이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이 사신들 성 씨 중에 고구려 지배 계급의 성씨로서

압도적으로 많았던 고 씨들이 26명이나 보인다는 점이다.


외국에 보내는 사신을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외교 통상부

국장급이상은 파견했을 텐데 그런 국가 상층부에 이렇게 말갈족이

없고 고씨같이 과거 고구려의 통치 집단을 연상케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이미 발해의 통치 시스템이 건국 초기부터 고구려의

독점 상태임을 알 수가 있다.


일본의 에치젠 지역 [ 붉은 부분]- 발해 선박들이 출입하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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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서기 759년 내일한 발해 사신에 대한

기록 사항이다.


-천황이 궁전의 끝 쪽 가까이 나와 고구려 대사 양승경에게 정삼위의

 벼슬을, 부사인 양태사에게 종삼위를 국왕과 대사 이하에게는 지위에

 맞게 녹을 내렸다.-


중국이 불렀던 발해라는 이름이나 발해가 스스로 자칭했던

진국[震國]이라는 국가 이름이 있는데도 고려라는 이름을 쓰는 것이

정말 놀라워서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추가 사실이 더 발견되었다.

고려라고 스스로 칭한 것은 바로 발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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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경이 일본을 방문하여 전달한 문서에서 당시 왕인 문왕(文王)은
자신을
고려 국왕이라 하였다.

이후에 고려 국왕 혹은 고려라는 명칭이 한동안 일본 기록에 등장한다.

이 고려라는 명칭에 대해 중국 학계는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스스로를

‘고려국’이라 칭하고 상대방도 동일하게 사용했다는 것은 분명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고려는 고구려가 장수왕 때부터 쓰던 국가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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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가 스스로 고려라고 망한 국가의 국호를 대외적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발해의 집권층이 알려 진대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연립한 상태였다면 힘든 노릇이다. 


짐작컨대 고구려 유민들은 당나라에 대결하기 위해 군사력의
협조를
얻기 위해서 말갈족들과 연립했다가 건국에 성공하고
세월이 가면서
이들 말갈족은 권력투쟁 속성상 발해 권력층에서
모두 도태된 것으로 본다.


여기에 더해서 발해 사신들이 일본의 지식인들과 시회(詩會)를 가진

기록도 있고 이들이 남긴 시도 너 덧 수가 일본의 기록에 남아있다.


시(詩)라고 하는 고급 취미를 즐길 정도의 지식인들이 발해의

통치 계급 수준이라는 것을 이 기록은 분명히 보여준다.

말갈족은 이 때 문자도 없던 때이다.


네 번째로  발해에서 대규모의 이민 집단이 일본을 찾아온
기록을
검토 해 볼 이유가 있다.


746년 발해인 및 철리인 1,100명이 찾아 왔는데 일본 기록은 이들은

발해인[고구려인]과 철리인[여진족]으로 분명히 갈라서 구별했다.

철리인들은 흑룡강을 오르내리면서 수산물 채취로
살아가던 족속이라서
바다를 들락거리며 닦은 항해술에도 
바다에도 진출했을 듯싶다. 
일본에 온 발해인들은 이들의 배를 타고  동해를 건넜던것 같다.


역시 779년, 발해인과 철리인 359명이 일본을 찾아 왔을 때도
일본은
두 민족을 뚜렷이 구분해서 기록했다.

[일본은 두 번 다 이들을 잘 대접하고 돌려보냈다.]


한 나라에서 온 민족을 타국에서 나누어 구분했다는 것은 두 고구려나

말갈족 사이에 물과 기름같이 따로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이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발해가 결코 말갈족이 중심이 되어 건국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은

앞의 무왕과 문왕 때 말갈에 대한 정복사업을 계속하여 철리(鐵利),

불열(拂涅), 월희(越喜), 우루(虞屢)말갈이 발해에 편입된
사실이라던가
과거 발해인 거주 지역에서 발견되는 온돌들이
이를 증명해준다고 하겠다.

발해가 말갈족의 나라라면 이렇게 동족인 말갈들을 집요하게
토벌하지 않았을 것이다.


발해는 고구려보다 두 배나 큰 나라를 건국했던 우리 민족사

최대의 강국이었다.
 

중국이 멀쩡한 고구려의 역사를 강탈을 시도한 것은 최근의 일이고

발해는 일찌감치 자신의 역사 속으로 전리품처럼 집어넣어 버렸다.


그들은 한국의 발해연구 접근을 차단하려고 발해 수도 동경성의

발굴 현장 방문도 허용하지 않았을 뿐더러 발해 무왕의
딸인 정효
공주의 묘는 완전히 벽돌로 둘러싸버렸다.

정효공주의 묘실 벽화. 한국인들은 접근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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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가면 발해사는  중국제 분칠을 한 괴물로 둔갑해서
한국인들로 부터 영원히 멀어질 수가 있다.


그런 실정임에도 한국내 발해사 전공 박사는 단지 세 명 밖에 없다.

고구려 역사 도둑질과 싸우는 것도 좋지만 빼앗긴 발해의
역사 탈환을
위한 공세적인 시동을 거는 것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당국의 관심과 투자를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