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history

무적 몽고에 맞선 고려의 30년 위대 항전 중편

Jinyoung Ssangkum Ryu 2009. 1. 4. 17:43

무적 몽고에 맞선 고려의 30년 위대 항전 중편
2008/08/24 오후 3:38 | 무적 몽고에 맞선 고려의 30년 위대 항전

 


무적 몽고에 맞선

   고려의 30년 위대 항전 中編

                  - 침공군 대장 살레타이 사살  


몽고는 1231년 최초로 고려에 침공하여 여몽 전쟁의 전단을 열었다.

대몽전쟁은 침공과 방어의 특성상 일차와 이차로 분류한다.


일차 대몽 전쟁이 1231년에 시작하여 1234년까지 비교적 짧게
지속되었지만
이차 대몽 전쟁은 고려가 개경에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본격 항쟁함으로서 1235년부터 1259년까지
무려 25년까지
장기간 계속되었다.


이 30년 두 번의 전쟁에서 몽고는 그들의 기병군단을 휘몰아 무려

열한차례나 고려를 침공하였다.

몽고가 작은 국가하나 말살하겠다고 열 한 번이나 침공한 예는 없었다.


지면은 한정되었으므로 이 침공을 하나하나 소개하기조차 힘이 든다.

그래서 고려의 군민이 한 몸이 되어 싸웠던 영웅적인 전투를

중심으로 소개를 해본다.


1. 귀주성 싸움

귀주성은 이미 그 200년 전 1019년

강감찬 장군이 고려를 침공한 글안대군 10만을 궤멸시킨 역사적

전적지이기도 했다.


조선 시대 동국통감 저자 서거정은 이렇게 이 귀주성을 싸움을 평했다.


‘오호라 ! 외로운 성, 약한 군사로 천하의 사납고 강성한

오랑캐를 맞아 동으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를

산악처럼 우뚝 서게 하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성을 잘 지킨 것은 안시성 이후 또 귀주가 있으니

박서와 김경손의 공은 크다 아니 할 수 없도다.‘


이곳에 몽장 살레타이의 지휘아래 1231년, 4만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에 있던 함신진성과 철주성을 함락한
몽고군의 일대가
귀주성으로 몰려 왔다.

그 병력은 일 만 명에 달했다.


여기에 맞서는 고려 병력은 근처의 성의 군민을 집결시킨

5,000명에 불과했다.

병마사 박서가 분도 장군 정주, 분도장군 김경손, 삭주 분도장군 김중온,

정주부사 박득분, 위주부사 박문창 및  5000명의 삭주 태주 귀주의
수령들과 함께 5,000명의 병력으로
수비하고 있었다.


귀주성의 위치 - 약도는 강감찬 장군의 작전 상황도
---------------------------------------------


다른 삼 만 명의 몽고 기병군단의 바람과 같은 기세로 서경을 지나고

개경을 목전에 둔 동선역 북방 증산 답동 탑동일대까지 진출하여

개경을 공략할 준비를 한다.

이때만 해도 몽고는 고려를 쉽게 먹어치울 줄 알았다.


여기서 공격하는 몽골군과 방어하는 고려군민 사이에 40일간

피비린내 나는 공방전이 벌어진다.


영웅적인 귀주성 전투를 소개한다.


▼엄청난 대군이 성 밖에 포진한 것을 본 고려 군민은 위축되었다.

그러자 남문을 지키던 분도 장군 김경손은 12명의 지원자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서쪽 성벽을 넘어 용산에 있는 

몽고군의 서측방을 기습했다.


흑기를 들고 있던 몽고의 지휘관 한 명을 일격에 죽이고

그 들 진중에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베고 찌르고 쏴 죽였다.

몽고군 진영에 혼란이 일게 하였다.


이와 같은 용감한 활약을 본 귀주성의 군민은 사기가

백배 충천하였다.

박서는 군사를 휘몰아 일제히 성문을 열고 뛰쳐 나가

몽골군을 공격했다.

견디다 못한 몽고군은 북쪽으로 철수했다.


▼ 이틑날 9월 4일 몽고군은 압도적인 대군으로 다시 귀주성을

파도와 같이 파상 공격했다.

귀주군은 이들을 선방하며 중간 중간 성외 출격을 감행해서

몽고군을 타격했다.


몽고군은 성외 출격을 한 위주부사 박문창을 포로로 하였다.

몽고군은 간단한 심문만 한 뒤 그를 성안으로 되돌려 보내며

투항을 권고하게 했다.


돌아와서 시키는 대로 하는 박문창에 분노한 박서는 몇 시간 전까지

부하였던 그의 목을 쳐서 그 목을 몽고군에게 돌려보내
항전 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추상같은 결사의 의지였다.


▼ 같은 날 여몽군 사이에 바위를 멀리 발사하는 발석기라는 무기를

동원하여 현대의 포격전과 비슷한 대규모 화력전이 있었다.


몽고군은 주공격 대상을 남문으로 전환하고 거대한 발석기 15량을

남문 밖 수십 보 지점의 대로상에 거치하고 남문의 성루를 향하여

포격을 가하였다.


몽고군의 포격에 의하여 남문 문루와 성문 동쪽이 성벽 일부가
파손되었다.

고려군도 이에 지지 않고 성벽위에 포좌를 쌓고 포차로 바윗돌을
날려
몽고군의 포대에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현대어로 이야기해서 반 포대 사격을 한 것이다.

고려군의 정확한 포격으로 몽고군의 장수 1 명과 수 십 명의 병사가

포살되자 몽고군의 포격을 중지하고 귀주 북쪽의 본진으로 철수하였다.


▼9월 달에 귀주성 공격을 개시한 몽골군은 무려 다섯 차례나
총공세를
가했으나 다 실패했다.

12월 하순 침공 몽고군 총사령관 살레타이는 직접 총병력을 지휘하여

귀주성을 공격했다.

이때 공성용의 사다리인 운제(雲梯 )수 십기를 일시에 동원하여

4면에서 성벽을 기어오르자 고려군은 대형 칼인 대우포(大于捕)를

동원하여 사다리위에 붙은 몽고군을 살상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성내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이 모두 성벽위로

올라와 필사적으로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고려군은 궁시와 석포로 몽고군을 공격하는가하면 일부 날쌘
장정들은
성문을 열고 뛰쳐나가 몽고군과의 백병전을 벌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저항에 끝장을 보려고 덤벼들었던 몽고군도 할 수없이

귀주성 점령을 포기했다.


전투가 한창일 때 몽고측에서 70이 다된 노장 한 사람이 성밑까지

접근하여 고려군의 배치 상황과 병기및 장비들을 살펴보고 나서

다음과 같이 찬탄해 마지않았다.

 

“내 소년 시절로부터 수없이 많은 전투에 종군하였지만 이처럼
아군의
맹공을 받고도 끝내 항복하지 않은 경우는 본적이 없었다.

이 성안의 장수들은 반드시 훗날 장상(將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남쪽으로 내려간 몽고군에 위협을 느낀 조정은

강화를 서둘러 했다.

왕명에 의해서 장장 사 개월을 아수라와 같이 싸워서 성을 지킨

박서는 다음 해 일월 성을 몽고군에 내주고 철수해야 했다.


사실 침공 몽골군의 삼분지 일을 넘는 몽고 북로군 일 만 명을
무려
4개월이나 귀주성에 붙잡아 놓은 바람에 몽골군의
고려 침공은
초반부터 차질를 면치 못했다.


주력 부대는 이미 황해도 동선령 부근까지 남진하여 고려 중앙군격인

경군(京軍)과 치고받는 전투를 벌이며 대치하고 있었으나 후방에
불안을
느껴 스스로 청천강 이북으로 철수하며 눈치를 보아야 했다.


여기서 시간을 번 고려는 개경의 주력부대로 구성된 경군을 구성해서

파견하여 동선령에서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된다


2.동선령 전투

동선령 전투는 30년 대몽전쟁에서 야지에서 여몽군이 야전으로

붙은 흔치 않은 전투이다.


▼산적마저 달려 나와 싸운 격전

대장군 채송년이 최고 사령관이었던 병마사 고려 경군은 황해도
봉산
서쪽 동선령에 방책을 치고 몽고군을 기다렸다.

그러나 서경을 우회한 몽고군은 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동선령의

고려군을 급습했다.


이에 상장군 이자성, 장군 이승자 노탄등의 장수들이 힘을 다하여

막았으나 이자성이 화살에 맞아 쓰러지고 노탄은

창에 맞아 말에서 굴러 떨어지는 대 피해를 입었으나 다른
경군 부대가
몽골군의 배후를 쳐서 겨우 물리쳤다.


다음날 야전은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채송년은 이미 설치한

목책에 의지한 방어 전투로 전술을 바꾸었다.


그러나 몽고군은 다시 공격 해 와서 목책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일부분의 목책이 다 타버리자 그 사이로 그들의
타격부대인
기병을 투입하였다.


이에 목숨을 벗어던질 각오를 한 산원 이지무와 이인식이 이끄는

너덧 명의 용사들이 백병전으로 겨우 이들을 물리쳤지만

몽골군은 계속 목책을 불태우며 돌입 기회를 노렸다.

실로 위기였다.


이때 인근 언덕에서 전쟁 구경을 하고 있던 황산이 근거지인

두 산적 놈이 있었다.

관군에 체포되면 극형을 면치 못할 범죄인 신분의 이들에게
뜨거운
민족의 피는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이 위기를 보다 못해 달려 내려와 경군에 합류했다.

그리고 선두에 나서 활로 연사하여 몽고군 서너 명을 사살했다.

동선령 전투는 역시 경군의 한 부대가 몽고군의 후미를
기습하자
몽고군은 패주했다.

이 일화는 대몽 전쟁이 민(民)과 관(官)과 군(軍)뿐만 아니라
산적
(賊)까지도 총동원했던 민족 대항전이었슴을 알 수가 있다.


3.자주성 최춘명의 옹고집 전투

동선령에서 몽고군에게 힘든 전투로 겨우 승리를 한 고려 경군은

북상해서 안북성에 방어진을 쳤다


그러나 안북성 전투에서는 고려 경군은 대패하여 경군의
절반이
전사했고 성은 함락되었다.


이때 고려군은 작전 실패로 몽골군이 그들의 장기인
기병부대를
마음껏 쓰게 하는 실수를 범했었다.


안북성을 함락시킨 몽골부대는 그 다음 성이 자모산성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방어사 최춘명은 군민이 합동한 부대를 잘 지휘하여

몽고군의 공격을 잘 받아냈다.


그러나 고려 조정과 침공 몽고군 사이에

강화조약이 잘 추진되어 조정에서는 일선 전투 부대에
적대 행위를 중지하고 몽고군에 항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앞에서 선전한 귀주성도 항복했고
안북성에서 대패하고
서경성으로 물러나 있던 경군도 항복했다.


그러나 자주산성 최춘명은 조정에서 파견한 내시낭중 송국첨과의

면담을 거절하고 성문을 굳세게 잠그고 저항을 계속하였다.


조정이 다시 집대성이라는 중신을 보내 몽고의 장수들과 함께

성문으로 다가가 면담을 요청했다.

할 수없이 성문을 열고 이를 만나 본 최춘명은 단호히 항복을

거부했다. 


그러자 때를 엿본 몽고군은 열려진 성문으로 돌격을 했으나
성루에
미리 배치해 놓은 고려 궁수들이 일제 사격으로 몇 명을
쓰러뜨리자
단념하고 물러났다.

최춘명의 저항은 전원 몰살의 위험성을 각오한 것이었다.


그 해 11월 인근 평주성은 저항하다가 함락 당했는데 몽고군은
성의
군관민 전원을 한 명도 남겨두지 않고 살해했었다.


최춘명은 몽고군의 배후에서 위협적인 무장 세력으로 존재하며

다음해 일 월 그 들이 철수할 때 까지 옹고집으로 버티었다.


4.충주성 전투


개경을 돌아 남쪽으로 진군한 몽고군은 지금 남한산성인 광주산성

공격에 실패하자 다시 남하하여 충주성을 포위했다.

이 충주성 전투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지휘관없이 싸워 이긴 노비 부대


충주성에는 방어군인 별초군이 조직되어있었다.

양민들인 양반 별초와 관노비들로 구성된 노군 (奴軍) 그리고
관청의
잡역 종사자들로 구성 된 잡류(雜類)등의 세 부대가

별초 부대의 기간이었다.


그러나 몽고군이 몰려오기 전부터 양반 별초 부대 대장 충주부사
우종주와 다른 두 부대 지휘관 유홍익 사이에 전술에 대해서 심한
의견 갈등이 있었는데 몽고가 공격을 개시하자 두 사람과 간부들
그리고 양반 별초 부대는 빠짐없이 성을 버리고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심지어 노비 부대를 지휘해줄 초급 간부 한 명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전투 경험 없던 노비들과 잡류들은 자치적으로 지휘관을 뽑고

방어 작전 계획을 나름대로 세워서 이들 세계 최강 몽고군을
물리치는
진기한 기록을 세웠다.


5.처인성 전투


몽고군이 이차로 내침한 1232년 침공군 대장 살레타이는 다시
광주성을
공격했다가 실패하고 용인으로 방향을 틀어 진격했다.


지역 군관민은 전부 근처의 산성으로 도주해버려 몽골군은
텅텅 빈
용인성을 점령했다.


살레타이는 그 남방 처인성에 고려 군관민이 있음을 알고
이를
공격하기로 했다.

여기서 세계 전사에서도 드문 침공군 대장 사살이라는
대사건이 발생했다


▼ 살레타이 사살


이 처인성은 둘레가 단지 425미터에 지나지 않는

작은 시골 공설 운동장 크기의 성이었다.


이곳에는 군창이 있었다. 
전쟁이 전에는 부곡(部曲)천민들이 모여 살았었다

이곳의 지휘관은 정식 군인이 아닌 승장(僧將 ) 김윤후였다.

그는 지휘를 맡자 성의 방비를 단단히 하고 성 밖 300미터 지점

언덕에 (현재는 살장터로 불림)에 수 십 명의 저격수를 배치했다.


아무도 몰랐던 적장 살레타이는 단지 5,6명의 기병만을 데리고

지형 정찰에 나섰다.


그 일행이 고려군 매복지점에 이르자 이들은 갑자기 집중사격을

가해 이들을 전원 사살하고 살레타이의 목을 베었다.


몽고군 기병들은 외곽에서 이를 보고 달려 왔지만 처인성에서
달려 나온
본대에 의해 대패 당한뒤 그들의 대장 시신도 수습 못하고
도주하였다. 

고려군은 틈을 두지 않고 혼란에 빠진 그들 본대까지도 기습하여

이들을 패주시켰다.


살레타이의 전사로 2차 침공 몽고군은 지리멸렬하게 되었고 그 뒤
고려영내 도처에서 고려군의 반격으로 패배를
거듭하다가 다시 강화를 요청하고 철군했다.


한국인들의 대몽 전쟁 인식 부족을 나타낸 그림.- 박물관(기념관)에
걸린 민족 항쟁화 - 성밖에서 살레타이가 사살됐는데 그림은
그가 수천명의 처인성 공격 몽고군을 지휘하다가 
사살된 것으로 그려져있다.
---------------------------------------------------
이 몽골 총사령관 살레타이의 습격 살해는 마치 한국 전쟁 중

미군 사령관 릿지웨이, 또는 반대로 중공군 사령과 팽덕회가

살해당한 것과 마찬가지다.


후세 사가는 이를 30년 대몽전쟁사에서 최대의 승리라고 평가하고 있다

승장 김윤후에게 조정에서 상장군이란 벼슬을 내렸다.

김윤후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 저는 전시를 당해서도 무기를 잡고 일어서지 못했던 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잘 것 없는 공으로 후한 상을 내리십니까 ? ”


그러나 고려 조정은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중용했다.
김윤후는 대몽 전쟁 후반기 충주성의 방어사령관으로
다시 몽고군을 격퇴하는 위대한 공을 세운다.

상편으로 되돌아가기 cli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