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EDONG KUMDO OVERSEAS ACTIVITIES/Russia

[스크랩] 사할린 다녀와서

Jinyoung Ssangkum Ryu 2006. 7. 11. 16:21
 

사할린 방문기


-박재만 (한의사 / 청년한의사회 연대사업국장, 녹색한방병원 근무)



 지난 5월 3일부터 6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러시아 사할린주 유즈노사할린스크(사할린주 수도에 해당)를 방문했습니다. 올여름에 있을 사할린 동포진료활동 사전 답사로 현지 단체와 직접 만나 여러 실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에서 5월 9일은 2차 세계대전 전승기념일 경축행사가 국가행사로 있어 러시아로 들어가는 비행기편이 매진되어 예정보다 하루 일찍 당겨서 출국하게 되었습니다. 


 사할린, 극동의 북쪽 섬.


 러시아 사람들은 독한 보드카를 즐겨 마신다, 추워서 두꺼운 털옷을 입고 다닌다, 미남, 미녀들이 많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영토분쟁이 있었다, 일제시대 우리 동포들이 대거 징용되어 끌려갔다, 소련이 해체되고 사회체제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사할린에는 바다로 나간 연어들이 회귀하는 거대한 섬이라는 사실 등등이 내가 아는 사할린에 대한 조각조각 지식들이었습니다. 낯선 곳에 가서 누군가를 처음 만난다는 것은 두려움보다 설레임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낯선 이국땅에서 강제로 생의 대부분을 살아야했을 우리 동포들을 그곳에서 만난다는 것은 마냥 여행의 설레임만 주지는 않았습니다. 고난했던 역사와 기나긴 시간만큼이나 사할린으로의 여행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태어나서 가장 북쪽으로 가본 여행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사할린 땅은 포근한 황토 흙빛이 아니라 얼어있을 것 같은 흑빛 검정이었습니다. 사할린은 한참 눈이 녹고 있었습니다. 보통 5월이면 눈이 다 녹는다고 하는데 올해는 늦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도로는 질퍽질퍽하고 차들은 검정 흑탕물 범벅이었습니다.


 거리의 사람들 표정은 무표정이 많았습니다. 특이한 점은 거리에 혼자 다니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았더니 러시아 사할린 사람들은 여럿이 어울려 먹고 마시고 즐길만한 정서적, 경제적 여유가 많지 않아서 일거라고 합니다. 사회주의 소련이 붕괴되고 자본주의가 도입되면서 먹고 사는 문제가 더 궁핍해졌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최소한 주택, 교육, 의료 등등은 무상으로 제공되어 기본 생계는 유지되었는데 근래에는 벌이도 마땅치 않고 한달에 3천 루블(우리 돈으로 10만원 정도) 연금으로 살아가는 다수 노인층에게는 기본 생계유지 자체가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는 것도 1년에 한번하는 연례행사처럼 돼버렸다고 합니다. 사할린의 주요 산업인 석유와 가스 산업은 외국기업들이 독점해서 자동차 기름값만 오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할린 물가가 워낙 높아서 밥 한 끼에 보통 7-8천원씩 할 정도입니다. 사람들의 주머니는 작고 먹고 사는 데 드는 비용은 많고 그래서 사할린은 최근 몇십년간 인구가 70만명에서 60만명 정도로 감소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희망 보다는 무언가 탈출구가 필요한, 사람들의 얼굴에 무표정이 굳어가는 듯했습니다.


사할린, 헤어짐과 정착의 역사


 1938년 일제가 국가총동원령을 발동해 우리 동포 수십만명을 징용, 학도병, 정신대로 끌고 갔습니다. 사할린에는 15만명이 징용되어 주로 사할린 북부 탄광에서 일본 군수산업에 석탄 연료를 공급하는 일에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그중 10만명은 일본 패망이후 또다시 일본으로 강제 이주당해 이중 징용의 고초를 겪게 됩니다. 그중 1만명은 중앙아시아 일대로 이주하고 4만명이 사할린 섬에 남아 현재 징용갔던 동포 1세대는 3500명 정도가 살아있다고 합니다. 물론 동포 후세들이 나고 자라 현재 4만명 정도에 이른다고 합니다.


 동포 1세대들은 우리말과 러시아말을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사용하지만 후세들은 한국말을 거의 못한다고 합니다. 한국어는 우리가 제 2외국어 하듯이 방과 후에 따로 배운다고 하니 조국이 멀어져있는 듯 했습니다. 이번 답사 때 사할린우리말방송국을 방문했는데 우리말을 알리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동포들은 우리말로 방송을 한다는 데 자부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MBC에서 무상으로 제공해주는 ‘대장금’을 방영하고 있는데 동포 사회에서 최대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 답사에는 사할린 한인이산가족회 사무실, 사할린 박물관, 사할린주 보건국, 사할린 지역병원, 아라리아 요양원을 방문하여 제반 실무사항을 협의하였고 목표한 나름의 성과가 있어 오는 7월 15일부터 22일까지 학술교류와 한방진료활동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사할린섬 북부에 위치한 탄광은 거리 관계로 다음에 방문하기로 하였습니다.


바다는 하늘을 닮아 파랗다.


 사할린으로 가는 비행기를 탑승할 때 사할린에 대한 단편들을 떠올려보았습니다. 비행기는 땅을 떠나 구름 위를 순탄하게 비행하고 있었습니다. 구름 위에는 비나 눈이 오지 않습니다. 번개도 치지 않습니다. 옛 사람들이 하늘나라는 평화롭고 세속 땅세상은 시끄럽고 혼란스럽다고 한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식견이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바다는 하늘을 닮아 파랬습니다. 온통 하늘뿐인, 아래로 온통 바다뿐인 공간을 아무 눈요기거리 없이 간다는 것은 지겹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평온함 그 자체였습니다. 평온한 비행기 속에서 이역만리 징용 떠나야 했을 그 당시 동포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잠시 상상해보았습니다.


 시간을 거슬러올라 1941년 어느 날 밤 부산항은 분주했을 겁니다. 전국 팔도에서 차출되어온 장정들과 아낙네들이 어디론가 떠날 배에 탑승하기 전입니다. 배웅나올 형편이 되지 못한 사람들은 말없이 깜깜한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망국의 설움이 이렇게 크지는 못했을 겁니다. 내가 탄 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두려움이 끝도 없는 바다만큼이나 컸을 겁니다. 고향과 가족을 떠나온 서러움만큼이나 앞으로 닥쳐올, 살아내야할 삶이 얼마나 거칠지 그들은 알 수도 없었습니다. 또 언제쯤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는 오긴 오는 걸까 아무도 답할 수 없었습니다. 몇날 며칠을 거쳐 그들이 도착한 땅은 매섭고 검은 땅, 사할린 섬이었을 것입니다.


 동포들의 고난한 삶을 떠올린 건 비슷함에서 오는 유추가 아니라 상반됨에서 오는 반추였습니다. 마치 영화 'Back To The Future'처럼 과거로 되돌아가 사건을 되돌려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60년이 넘게 돌아오지 못한 그들을 진료한다는 건 그들의 기나긴 인생 역정을 아주 잠깐 함께 하는 것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잠시라도 고국의 향취가 전해질 수 있다면 우리는 족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고국에 돌아갈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또  한번 던져주기를 바랍니다.


 징용 1세대는 일제로부터 해방되던 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자를 말합니다. 지금은 동포 1세대 중 희망자에 한해서 귀환할 수 있습니다. 광복절에 태어났다 해도 60살일텐데 80이 다 된 노인들이 홀홀 단신 고국에 온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최근 몇몇 뜻있는 국회의원들이 사할린 동포들이 직계 한 가족을 동반해서 귀환할 수 있도록 특별법을 발의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 아직까지 심의도 들어가지 못한 실정입니다. 동포들이 낸 귀환 희망서에는 하나같이 “고국에 돌아가 죽고 싶다.”는 삐뚤삐둘한 글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연어를 기다리며

 사할린은 바다로 떠나갔던 연어떼들이 돌아오는 섬이라고 합니다. 물고기들이 얼마나 많은지 물보다 더 많다고 합니다. 그런 연어들도 때가 되면 저 태어난 고향을 찾아드는데 우리 동포들은 회갑의 시절도 넘게 다들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운 조국의 품에 돌아오기를 간절히 희망할 수 있게, 사할린은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돌아오지 못한 역사, 사할린 동포를 고국의 품으로!”


   

출처 : 민중과함께하는 길벗
글쓴이 : 새로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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