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EDONG KUMDO OVERSEAS ACTIVITIES/Armenia

아르메니아공화국에 대하여 - 곧 아르메니아에도 해동검도가 보급된다.

Jinyoung Ssangkum Ryu 2007. 6. 16. 22:18
 
아르메니아[Arme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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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명칭 : 아르메니아공화국(Republic of Armenia)
인구 : 2,991,000
면적 : 29,743 ㎢
수도 : 예레반
정체·의회형태 : 중앙집권공화제, 다당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총리
공식 언어 : 아르메니아어
독립년월일 : 1991. 9. 23
화폐단위 : 드람(dram)
국가(國歌) :Mer Hayrenik azat, ankakh("Land of our fathers, free and independent")
본문

목차  
개요  | 자연환경  | 국민  | 경제  | 정치·사회  | 문화  | 역사  | 한국과의 관계  

(아르)Hayastan. 공식 이름은 아르메니아 공화국(Republic of Armenia/Hayastani Hanrapetut'yun).
자카프카지예 지역에 있는 국가.
[개요]

소련을 구성했던 공화국 가운데 하나이며 서남아시아의 유서깊은 지역에 위치한 국가이다. 역사적으로 국경선의 변화가 상당히 심했던 지역으로 고대 아르메니아가 지금의 아르메니아와 터키 북동부 지방에 걸쳐 있었던 반면 오늘날의 아르메니아는 자카프카지예 지역의 3개 국가(그루지야·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가운데 가장 좁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터키령(領) 아르메니아는 아르메니아와 달리 정치적으로 독립하지 못했고 대부분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르메니아에 거주하는데 터키령 아르메니아에는 소수만이 살고 있다. 아르메니아의 수도는 예레반이다. 면적 29,743㎢(1923년 이후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16%[영유권 분쟁을 빚은 나고르노카라바흐 면적 4,400㎢포함]는 1993년 이후 아르메니아 영토임), 인구 3,061,000(2003 추계, 나고르노카라바흐 인구 13만 명 포함).


국기
지도

[자연환경]

아르메니아는 북쪽과 동쪽으로 그루지야와 아제르바이잔, 서쪽으로 터키, 남쪽으로 이란과 접해 있다. 자카프카지예 지역 남쪽 부분에 위치하며 평균고도가 해발 1,800m에 이르는 산악지대이다. 북부를 소(小)카프카스 산맥이 가로지르고 중동부에 세반 호가 있다. 고도에 따라 심하게 변하는 건조한 대륙성기후가 나타나는 반사막지대로 향나무·알로에·찔레꽃·인동덩굴 등의 내한성(耐旱性) 식물이 자라며 비교적 낮은 지역에는 내한성 풀로 뒤덮인 광대한 스텝 지대가 펼쳐져 있다. 따뜻한 평원과 구릉지대에서 무화과·석류·복숭아·포도 등이 재배되며 좀더 높은 곳에서는 담배·곡물류·과일류가, 해발 2,400m 이상 되는 지점에서는 곡식·감자·사료식물 등이 재배된다. 산비탈마다 가시덤불과 향나무가 울창하며 고지대 초원에서는 여름철 방목이 이루어진다. 남동부와 북동부에는 국토 면적의 거의 10%를 차지하는 산림대가 있다. 야생동물로는 살쾡이가 도처에 살고 반사막지대에는 멧돼지·재칼 및 다양한 종류의 뱀들이, 산림지대에는 시리아 곰이 서식한다.


[국민]

국민의 90%는 아르메니아인이고 그밖에 아제르바이잔인·러시아인·쿠르드족·우크라이나인 등도 소수 거주한다. 주변의 다른 공화국들과 마찬가지로 점차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다.


[경제]

아직까지 농업이 주요산업이지만 공업화가 급속히 추진되고 있다. 예전에는 농작물·구리·브랜디의 생산지였으나 오늘날에는 화학제품·비철금속·기계·정밀기계·직물·의류·포도주·통조림제품 등의 공급지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여전히 농업에 종사하여 주요작물인 양조용 포도 외에 과일·채소·담배·목화·사탕무 등을 재배하고 소·양을 사육한다. 산악지대의 불편한 교통을 철도와 조밀한 도로망을 통해 해결하는 한편 산록의 급류로 일으킨 수력발전이 산업화에 큰 몫을 담당했다.


[정치·사회]

소련 시절의 헌법(1978)을 대체한 새 헌법(1995)에 따라 입법부·행정부·사법부가 분리되고 행정부의 권한이 강화되었으며 기본권과 시민권이 구체적으로 열거되었다. 단원제인 의회는 4년 임기의 의원 131명으로 이루어지고 예산 승인, 조약 비준, 전쟁 선포 등의 권한을 갖는다. 직접선거로 선출되는 대통령은 5년 임기로 1회 연임이 가능하다.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은 의회의 승인을 얻어 각료와 고등법원 판사를 임명하며 대통령령를 발할 수 있다. 사법부에는 예심법원·상소법원·파기원(최고상소법원) 및 9명의 판사로 이루어진 헌법재판소가 있다. 헌법재판소는 법령의 위헌여부를 결정한다.

아르메니아는 여러 주(州 : '오블라스트'라고 함)로 나뉘는데 지역공동체 단위의 지방정부는 시장이나 마을의 연장자가 통치한다. 소련하에서는 소련공산당의 통제를 받던 아르메니아공산당(Communist Party of Armenia)이 실질적으로 독재를 했지만 현재는 다당제로 바뀌었다. 독립 이후 아르메니아를 통치해온 온건 민족주의 정당인 아르메니아국민운동(Armenian National Movement), 1922년 소련에 흡수되기 전 잠시 아르메니아를 통치한 아르메니아혁명연맹(Armenian Revolutionary Federation : 다슈나크), 공산당을 승계한 아르메니아민주당(Democratic Party of Armenia) 등이 주요 정당이다.

전국적으로 8년제로 정착된 학제를 기준으로 무상 의무교육이 실시되고 있다. 교육은 일반학교·직업학교·중등학교에서 이루어지며 예레반국립대학교를 비롯한 고등교육기관도 있다. 의료시술은 병원과 진료소에서 모든 시민들에게 무상으로 제공된다.


[문화]

문헌화된 아르메니아 문학의 역사는 AD 5세기부터 시작된다. 사야트 노바(1712∼1795)의 연가(戀歌)가 아직도 애송되고 있다. 오늘날에는 작곡가 아람 하차투리안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고 아르메니아 태생의 화가 아르실레 고르키의 그림 또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문화기관으로는 국립 오페라·발레 학술극장과 몇 개의 연극 공연장, 어린이와 교향악단 전용극장, 예레반영화사 등이 있다. 양탄자 제조와 전통민속공예도 활발하다.


[역사]

고대 아르메니아는 한때 로마 제국에 대항할 정도로 강성했으나 이후의 역사는 많은 외국세력의 지배와 이에 대항한 독립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아르메니아 문화의 기초는 우라르투가 멸망한 BC 6세기에 성립되기 시작했다. 우라르투는 강력한 동맹국이던 아시리아가 바빌로니아와 메디아에 정복되자 그 여파로 스키타이인과 킴메리인에게 정복되었던 고대왕국이다. 스스로를 하이크인이라 부르던 아르메니아인들이 이주해왔을 때 우라르투의 발달된 농업기술은 아르메니아인들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새로 이주해온 아르메니아인들은 곧 메디아 제국에 흡수되었고 메디아가 BC 550년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영토로 편입되면서 이 지역의 통치는 페르시아 왕에게 공물을 바치는 각 마을 관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BC 331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르메니아를 정복한 후 BC 301년 셀레우코스 제국에 편입되었다.

로마가 BC 190∼189년 셀레우코스 왕조를 정복한 후에는 대(大)아르메니아와 소페네 두 지역으로 분할되었다가 아르메니아의 대왕 티그라네스 2세(BC 95∼55 재위)에 의해 통일되었다. 아르메니아는 그가 다스리는 동안 최고로 번성하여 인접 지역인 이베리아, 알바니아, 아트로파테네, 시리아, 파르티아의 일부 지역까지 세력을 뻗쳤다. 로마 제국 동쪽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급속히 부상했으나 BC 66년 강제로 영토를 할양하고 로마와 동맹을 맺은 후로는 AD 3세기까지 로마와 페르시아 파르티아 왕조의 각축 지역이 되었다.

성 그레고리우스가 아르사크 왕조의 티리다테스 3세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킴에 따라 페르시아 및 동양 세계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었으며, AD 300년에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390년 비잔틴 아르메니아와 페르시아 아르메니아로 분할되어 전자는 곧 비잔틴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후자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페르시아의 세력이 쇠퇴하자 비잔틴 세력권으로 들어갔다. 653년 아랍의 지배 아래 들어갔으나 실질적으로는 자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11세기 잠시 부흥했던 비잔틴 제국에 병합되었지만 곧 셀주크인들의 침략을 받아 11세기말에 이르러서는 나라의 대부분이 셀주크 투르크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영토의 대부분이 그루지야에 편입되어 있었던 13세기에는 몽골의 침략을 받기도 했다. 셀주크에 점령된 후 실리시아 지방으로 이주한 아르메니아인들은 소(小)아르메니아를 세워 십자군 전쟁기에 유럽과 굳게 동맹을 맺고 유럽 문화를 많이 수용했다. 13세기 시리아를 통한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침입을 막기 위해 몽골 군대를 고용하기도 했으나 1375년 수도가 함락되면서 독립을 상실했다. 16세기 초반 다시 적대관계에 있던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 사이의 각축장이 되어 짧은 독립기간(1722∼30)을 제외하고는 18세기까지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아르메니아는 동양과 서양을 잇는 교역로가 되었다.

아르메니아는 19세기초 러시아가 카프카스 지방으로 진출하면서 문화적으로 재건되었다. 해외에서는 투르크 제국 통치하에 있는 이들의 상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1877∼78년 러시아-투르크 전쟁으로 산스테파노 조약이 체결된 뒤 '아르메니아 문제'가 부각되었으나 개혁을 일으키려는 시도는 아르메니아 민중에 대한 투르크와 러시아의 대량 학살만을 야기시켰다. 1915년에는 오스만 정부에 의해 약 175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로 추방되었는데 도중에 60만 명 가량이 사막에서 죽었다.

1916년 러시아에 정복당한 후에는 그루지야·아제르바이잔과 함께 자카프카지예 동맹을 형성했으나 몇 달 지나지 않아 해체되었다. 1920년 아르메니아 공화국으로 잠시 독립했던 것을 비롯한 여러 차례의 정치적 격동 끝에 그루지야·아제르바이잔과 함께 자카프카지예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으로 재통합되었으며, 1922년 소련에 흡수되었다. 1936년 새로 개정된 소련 헌법에 따라 독자적인 소비에트 공화국이 되었다. 1980년대말 주민 대부분이 아르메니아인임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의 관할권에 속해 있던 이웃 산악지대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정치적 지위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소요사태가 일어났다.

1988년부터 수년간 아제르바이잔과 벌인 분쟁으로 수많은 아르메니아인이 사망했다. 1988년 12월 7일에는 큰 지진이 일어나 레니나칸과 스피타크 시가 파괴되고 2만 5,000여 명이 죽었다. 1989년 아제르바이잔으로부터 공급되던 전력이 끊겨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가동을 못하는 등 분쟁이 장기화되면서 경제가 매우 어려워졌고 주변국들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아르메니아는 그후 1990년 8월 23일 주권을 선언하고 1991년 12월 독립국가연합에 가입했다. 1992년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자치를 주장하며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 승인을 아르메니아에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한국과의 관계]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자적인 외교권을 갖게 된 아르메니아는 이듬해인 1992년 2월 21일 한국과 수교에 합의했으며, 북한과는 이보다 며칠 앞선 2월 13일에 외교관계를 맺었다. 주(駐)아르메니아 한국 공관장은 러시아 대사가 겸임한다. 1996년 대한 수출액은 41만 달러이고 대한 수입액은 107만 달러이다. 1997년 현재 교민은 3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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